20세기 미국 팝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포크 듀오인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은
아름다운 하모니와 유려한 멜로디를 들려준 것으로 기억된다. 그들이 1960년대에 히트시
킨 ‘Sounds Of Silence’, ‘The Boxer’, ‘Mrs. Robinson’, ‘Scarborough Fair’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국에서 오랜기간 사랑받은) ‘Bridge Over Troubled Water’ 등은 오늘날에도 이른바 ‘올디스
넘버’로 지속적인 대중적 인기를 받고 있다.
특히 ‘Bridge Over Troubled Water’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Top 100
‘류의 차트에서 여전히 정상권에 오르곤 한다. 물론 대중적으로 ‘아트 가펑클의 솜사탕 같
은 보컬과 아름다운 멜로디와 하모니’에 초점이 맞춰져 보이지만….
듀오의 리더이자 곡을 만드는 폴 사이먼의 뛰어난 작곡력이라든지 노래의 부드러움 속에
담긴 의미들은 경시되곤 한다. 어쨌든 명확한 사실은 사이먼 앤 가펑클이 1960년대 포크
(록)의 극치를 들려주었고 상업적인 성공까지 이루었다는 것이며, 그것이 ‘과거완료형’이
아니라는 것이다(미국내에서만 지금까지 5천만 장에 달하는 음반 판매고를 기록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은 1941년생 동갑내기 폴 사이먼(Paul Simon)과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이 만든 듀오이며, 이름은 이들의 성을 조합해서 만든 것이다.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은
어릴적 뉴욕에서 같은 학교에 다닌 학교 친구 사이였다. 이들은 음악을 좋아해서 같이 음
악을 듣고 카피도 하면서, 사이먼 앤 가펑클의 모태가 되는 듀오를 자연스럽게 결성했다.
때는 1957년, 이들의 나이 열 여섯 살 때였고, 그 듀오의 이름은 유명한 만화 영화에서 이름
을 따온 톰 앤 제리(Tom and Jerry)였다.
에버리브라더스(Everly Brothers)의 영향을 받은 노래를 부르던 톰 앤 제리는 첫 싱글 ‘Hey
Schoolgirl’을 히트시켰지만, 그 이후로 실패를 거듭하여 결국 1958년 해체하게 되었다.
이들이 학교를 졸업한 후인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 아트 가펑클은 컬럼비아 대학에
진학한 반면, 폴 사이먼은 본격적인 프로페셔널 뮤지션의 길로 들어섰다. 작곡과 기타 연
주에 재능이 있던 폴 사이먼은 때론 제리 랜디스(Jerry Landis)란 예명으로, 때로는 티코 앤
더 트라이엄프스(Tico & the Triumphs)란 그룹으로 작곡, 세션 활동을 해나갔다.
1964년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은 다시 한번 듀오를 이뤄 같
이 활동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듀오 이름을 사이먼 앤 가펑클로 간명하게 지었고, 컬럼
비아 레코드사(Columbia Records)와 계약을 맺었다. 일사천리로 녹음 작업까지 해서 그해
말 데뷔 앨범 [Wednesday Morning 3 A.M.]을 발표했다. 훗날 다른 버전으로 크게 히트한
‘Sounds Of Silence’가 본래의 어쿠스틱 버전으로 담겨 있지만, 이 앨범에 담긴 음악들을 이
들의 전성기 히트 곡/앨범들과 동일시할 수 있는 여지는 그리 많지 없다.
밥 딜런(Bob Dylan)의 ‘Times They Are A-Changing’, 이언 캠벨(Ian Campbell)의 ‘The Sun Is
Burning’ 등 리메이크 곡이 많이 담겨 있고, 어쿠스틱 사운드 일색이어서만은 아니지만.
이 앨범은 ‘Sounds Of Silence’가 미국 동부 지역 라디오 방송을 간간이 탈 뿐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
실망감에 다시 듀오는 헤어졌고, 폴 사이먼은 다른 환경에서 활동도 하고 자극도 얻을 겸
해서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 그는 기타 하나 메고 조그만 커피숍이나 퍼브(pub) 등
지를 다니며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BBC 방송에 출연한 후 이 미국에서 온 무명 포크 싱어
는 갑작스레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의 음반을 찾게 되자, 그는 스튜디오로 들
어가 곡들을 녹음하였고 브리티쉬 CBS에서 [(Paul Simon) Songbook]이란 타이틀로 발매했
다. 이 앨범은 사이먼 앤 가펑클 데뷔 앨범에 수록된 곡들과 신곡들을 합쳐 담은 것이다.
이렇게 단명할 수 있었던 사이먼 앤 가펑클이 다시 결성되어 성공하는데 하게 된 계기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밥 딜런이 어쿠스틱 포크에서 포크 록으로 변신하는데 일조했던
프로듀서 탐 윌슨(Tom Wilson)이 사이먼 앤 가펑클의 데뷔 앨범 수록곡인 ‘Sounds Of
Silence’에 일렉트릭 세션을 입힌 것이다. 그는 세션들을 모아 차분한 원곡에 일렉트릭 기
타, 베이스, 드럼 연주를 덧붙여서 록적인 액센트를 주었다. 그렇게 오버더빙되어 재발매
된 싱글은 사이먼 앤 가펑클의 섬세한 작곡과 뛰어난 하모니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한편
당시 막 떠오른 포크 록의 트렌드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Sounds Of Silence’ 포크 록 버전 싱글이 히트함에 따라 폴 사이먼은 미국으로 돌아와 아트
가펑클과 재결합했다. 그렇게 해서 1966년 초 나오게 된 2집 앨범은 아예 [The Sounds Of
Silence]란 타이틀로 발매되었다. 몇몇 곡은 사이먼이 영국에서 발매한 솔로 앨범 수록곡들
이었고, 전체적으로 아직 완연한 경지에 오르지는 않은 듯 보였다. 하지만 사이먼의 작곡
력은 점점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타이틀 곡은 싱글 차트 1위에 올랐고, ‘I Am A Rock’도
마이너 히트를 기록했다.
1966년 말에 나온 3집 [Parsley, Sage, Rosemary & Thyme]은 ‘Homeward Bound’, ‘The Dangling
Conversation’ 등을 히트시켰고, (이후 영화 [졸업(The Graduate)]에 삽입되어 인기를 끌었
던) ‘Scarborough Fair/Canticle’도 담고 있었다. 이 앨범은 전작들에 비해 음악적으로도 일취
월장한 면모를 보였다. 이들의 상업적 성공과 음악적 성숙이 완연히 시작된 것이다. 이들
을 국제적인 스타덤에 올려놓은 것은 뜻밖에도 영화 사운드 트랙 이었다
.
사이먼 앤 가펑클은 마이크 니콜스(Mike Nichols)의 두 번째 영화 [졸업(The Graduate)]
(1967)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였다. 당대에 비평적 찬사와 상업적 성공, 청년들의 지지와
아카데미상 수상을 동시에 성취한 영화 [졸업]은 현재에도 1960년대 미국 청년 반문화를
반영한 클래식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 영화의 성공과 함께 사운드트랙도 폭넓은 인
기를 모았다. 1968년 초에 발매된 OST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와 데이브 그루신(Dave
Grusin)의 연주곡이 번갈아 배치되어 실려 있다. ‘Sounds Of Silence’, ‘Mrs. Robinson’,
‘Scarborough Fair/Canticle’ 등 사이먼 앤 가펑클의 곡은 기존 곡들이었만, 영화와 시너지 효
과를 발휘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Sounds Of Silence’와 ‘Mrs. Robinson’은 1960년대의 대표적
인 노래가 되었다.
1968년 봄, 앨범 [Bookends]가 발매되었다. 앨범에는 ‘Mrs. Robinson’처럼 예전 곡들도 있었
고 신곡도 있었다.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듀오의 창작력과 하모니는 이 앨범을 통해 만
발했다. 이들의 시적인 가사, 농익은 연주와 노래는 창조적 폭발과 예술적 성숙을 자랑하
던 당대 대중 음악계의 기운과 비교해도 쳐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듀오의 파트너십
은 점차 균열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학창 시절에 만나 10년 넘게 같이 활동하면서 서로에
대해 새로움이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관계였다. 결정적으로 듀오로서의 문제도 있었다.
부드러운 미성의 고음을 자랑하는 아트 가펑클은 모든 곡을 만들고 노래도 부르는 폴 사
이먼의 다재다능함에 자신의 존재가 묻힌다는 생각(열등감?)을 했고, 폴 사이먼은 자신이
원하는 음악 세계를 펼치는데 듀오라는 편성이 걸림돌이 되어감을 느꼈다. ‘스포트라이트
가 누구에게 비쳐지는가’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마이크 니콜스 감
독은 자신의 영화에 아트 가펑클을 캐스팅했고, 가펑클은 연기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음악에 전념하려는 사이먼의 생각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 네 번째 정규 스튜디오 앨범 [Bridge Over Troubled Waters]가 발매 되었다. 이 앨범
은 그야말로 대박이 되면서 10주간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다. 오케스트레이션과 서정적인
아트 가펑클의 달콤한 보컬이 유려하게 결합된 타이틀 곡 ‘Bridge Over Troubled Waters’ 는
싱글로도 스매쉬 히트를 기록했고(국내에서도 꾸준한 사랑을 받는 올디스 넘버이다),
흥겨운 ‘The Boxer’, 멕시코 혹은 서부 영화 분위기의 ‘El Condor Pasa’, 라틴 리듬을 고용한
‘Cecilia’도 히트했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 미국에서만 천만장 이상 팔렸을 정도로 메가 히
트를 기록했지만, 이들의 마지막 정규 스튜디오 앨범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Bridge Over Troubled Waters’는 비틀즈의 ‘The Long And Winding Road’ 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사이먼 앤 가펑클이 해체된 결정적인 계기는 폴 사이먼이 만들고 녹음까지 마친 노래
‘Cuba Si, Nixon No’가 앨범에서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듯 정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있었는데, 음반사에서 싫어했으며 파트너인 아트 가펑클조차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폴 사이먼과 상의도 없이 이 곡은 앨범 [Bridge Over Troubled Waters]에 실리
지 않은 것이다. 결국 1972년 사이먼 앤 가펑클은 해체되었다.
해체 후 둘은 각각 솔로의 길을 걸었다. 그렇지만 그 방향은 달랐다. 아트 가펑클은 노래
보다 연기에 더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고 음반도 발표했지만 사이먼 앤 가펑클 시절에 미
치지는 못했다. 반면, 리더였던 폴 사이먼은 듀오 해체 후 자신의 음악 세계를 맘껏 펼쳐
나갔고, 대중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포크 록의 테두리에서
탈피, 월드 뮤직적인 접근으로 실험적인 음악들을 선보였으며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986년작 [Graceland]는 그래미상을 받기도 했다.
솔로 활동을 걸으면서도 이들은 이따금 짧게 재결합했다. 새 앨범 작업을 하지는 않고 주
로 (자선)공연을 위해서 잠시 모여 노래를 부르는 식이었다.1981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가진 공연은 약 50여만명의 팬들이 모여들어 성황리에 열렸으며, 이 때의 실황은 라이브
앨범 [Concert In Central Park](1982)로 발매되어 히트하기도 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은 1990
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에 헌액되었다. 돌이켜 보면 사이먼 앤
가펑클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포크(록)와 팝을 횡단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을 비틀즈로 비유하자면, 아트 가펑클은 ‘(작곡하지 않고)노래만 하는 보컬리스트로서
의 폴 매카트니’였고, 폴 사이먼은 ‘진보적이지만 급진적이지는 않은 존 레넌’이었다(실제
매카트니와 레넌은 둘 다 곡을 만들고 노래도 했다. 비유란 얘기다). 격변의 1960년대의 시
대와 공간에서 이들의 성공과 해체의 열쇠가 거기에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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