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에서_내리는_1억개의_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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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여기서 그를 보게 되다니.

비록 오래 전에 단지 한번 그를 만난 것뿐이었지만, 그의 모습은 새미의 가슴 깊은 곳에 각
인 되어 지워지지 않았다. 어디서든 첫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저  얼굴 선과 유연한 몸의 움
직임… 그가 틀림없다.

오늘은 자사제품을 뉴그린 백화점에 납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입사한지 석 달도 되지 않은 새미는 그녀에게 프리젠테이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믿어지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여 꼭 납품하고 말리라 다짐했지만, 그를 본 순간 어디론가
달아 나고 싶은 심정이 새미를 압도했다. 그가 뉴그린 백화점의 품평회 심사위원일 줄은 상
상도 못 했는데. 어떡하지…

새미는 긴 생 머리를 한 올도 빠짐없이 위로 올리고 유명 디자이너의 고급스런 아이보리 정
장 으로 세련되고 당당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차가운 외모 아래
숨겨 있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우아함과 자신감이 돋보이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를 본 순간 5분전의  자신감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지금 그녀는 금방이라도
무너 질 듯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심장박동이 터질 듯  빠르게 뛰고 호흡이 점차 거세졌
다.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어렵게 숨을 들이켜도 보았지만 땅이 회전하기라도 한 듯 눈앞이
뿌옇게 변하고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려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뉴그린 백화점의 심사위원은  새미의 라이벌 팀인  US의 의상을 심사하고  있었다. 다음이
(주)피 오레의 대표로 와 있는 새미의 차례였다.

드디어, 심사위원들이 새미의 앞에 서며  피오레의 의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서류를  들고
있는 금테 안경을 쓴 까다로워 보이는 중년의 심사위원이 질문을 던졌다.

“피오레라.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회사군요. 음.. 베이직은  괜찮고. 주로 타겟으로 잡고 있
는 층 은?”

“예. 저의 피오레는 …”

새미는 심사숙고하여 선택해 가져온 샘플 중 하나를 들었다.  애써 호흡을 가다듬고 제품의
특 성을 자세히 설명하며, 밤새 준비해 온 말을 읊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반쯤 얼어 자
신이 제대로 답변을 하고 있는지 의식 할 수 없었다. 단지 시간이  지나 이 자리를 피할 수
있기만 기 도했다. 그가 자신을 알아볼까 감히 그가 서있는 쪽으로는 시선조차 돌리지 못했
다.

하지만 새미의 걱정과는 달리 그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피오레의 의상만 세심하
게 살피고 있었다.

잠시 후 심사위원들이 멀어져갔다.

이사진들이 지나가자 새미는 그때서야 한 숨 돌리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길을 지나가면 누구나 한 번은 뒤돌아볼 큰  키와 넓은 어깨, 좁지만 탄탄한 힙. 그가  입고
있는 양복은 일류 디자이너가 그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처럼 카리스마와 그의  독특한
섹시함을 한껏 살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악마의 화신인 양 온  몸에서 남성미를 내뿜으며
사라지고 있었 다.

5년 전, 단 몇 초만에 새미의 이성을 앗아갔던 매력은 아직도 변함이 없었다. 새미는 멀어져
가 는 그를 보면서 여전히 미친 듯이 떨고 있는 자신의 나약함을 저주했다. 괜히 나만 걱정
한 건 가. 날 못 알아보다니. 그럴 만도 하지. 겨우 하룻밤뿐인걸. 강석민…

새미는 그의 아파트를 도망치듯 나온 5년 전 그날 밤으로 기억을 더듬어 본다.

5년 전, 새미는 갓 스무 살이 넘은 전문대 의상학과 졸업반이었다.

집안 형편으로 원하던 학교는 포기하고 온 학교였지만 그토록 바라던 디자인 공부를 할 수
있 다는 열정으로 오직 학과 공부에만 매달렸다.

다른 친구들은 미팅, 술등을 즐기면서  고등학교 때 못해 본 일에  매력을 느꼈지만 새미는
그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흔들릴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학업과 아르바
이 트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고, 앞으로의 취직문제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 날은 가장 친한 친구인 주희의 생일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모여 파티를 가졌다. 시간이 흐른 후 분위기가 무르익자 나이트로 장소를 옮
겼 다. 주희는 그냥 집에 가겠다는 새미를 고리타분하게 산다고 놀리면서 억지로 끌고 갔다.
입학 식 날에 있었던 과 모임 행사 때 와보고 처음인 곳이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새미였지만 친구들의 부추김과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로 벌써 여러 잔
의 술을 마셨다. 화려한 조명과 신나는 음악에 반쯤 취해있던 새미는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
자신 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눈빛을 떠올리면 새미는 아직까지도 몸을 떤다. 자신의 내면을 들킨 듯한 두려움마저 일
정 도로 강렬하게 이글거리는 눈빛이었다.

새미는 그의 눈길을 피하는 것은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덫에 걸린 것처럼 그
눈빛 에 꼼짝 못 하고 있자 그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 곡 괜찮죠? 저와 춤추시겠습니까?”

새미가 겁에 질린 듯 입술을 깨물며 눈을 깜박이자 그의 눈 속의 태울 듯한 이글거림이  따
뜻하 고 유혹적인 빛으로 변하며 싱긋 웃었다. 그 순간 새미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
을 내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런 곳에서 만난 남자와는 말도 하지  않을 새미이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그
때는 반쯤 미쳤나 보다. 음악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그 남자에 취해 그녀는 조금씩 자신을
잃어 가 고 있었다.

“새미씨. 잘 해냈어요?”

기억에 잠겨 있는 새미의 등을 치며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네?”

마케팅 담당인 조남우 부장이다.

부장이라고 하지만 전 인원이 열 명도 안 되는 벤처기업이라 서른이 갓 넘은 신출내기 부장
이 다. 이번 건에 회사의 사활이 달렷다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기에 조남우 부장의 얼굴에
도 아직 긴장이 가시지 않았다.

새미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석민과의 뜻하지 않은 재회에 놀라 혀가 굳은
탓 에 답변을 준비한 만큼 성실히 하지 못 했던 상황이 떠오르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글쎄요.. 워낙 쟁쟁한 팀이 많아서..”

새미는 자신이 없어 끝까지 말을 맺지 못했다.

어서 샘플을 정리하고 결과를 기다리고있는 회사로  떠나야 하는데 멍하게 서 있기만  하다
니. 제정신이 아니야! 하지만 여전히 몸이 떨려  자꾸만 손이 빗나갔다. 조금 전, 석민의 뒷
모습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조 부장은 옷걸이에 걸린 옷을 접어 상자에 집어넣으면서 말을 이었다.

“새미씨는 세밀하고 꼼꼼하니 잘 했을 거야! 큰 실수만 안 했으면 됐어요. 이번이 우리 회사
에 얼마나 중요한 기회인지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사실 이런 일류 백화점의 품평회에 참가
할 기 회가 우리 회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 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랬다. 피오레는 젊은 층을 주고객으로  하는 의류업체지만 역사가 5년도  되지 않은 신생
기업 이다. 차별화된 색상과 케주얼한 디자인으로 업계에서 좋은  반응은 얻고 있지만 대중
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 주로 소형 보세시장을 공략하며 주  거래를 하고 있다. 아직은 국
내 시장보다는 하청 주문 형식인 국외 수출이 회사의 총매출액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 일부 신세대에게 꽤 어필하고 있어 몇 년만 지난다면 톡톡
튀 는 개성과 세련미로 국내에서 알아주는 유명메이커로 성장할 잠재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
는 주 목받는 회사이다.

뉴그린 백화점에서 품평회를 연다는 정보를 듣고 신청서를 제출하기는 했지만 참가  승인을
받 을 줄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뉴그린 백화점은 국내에서  가장 큰 백화점 중의 하나
로 고급 스런 이미지를 최우선시 하는 일류 백화점이다. 국외의 유수 할인점이 한국에 상륙
하는 이때에 도전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성공하여 작년 업계 매출액 1위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러한 뉴그린 백화점에 납품만 할 수 있다면 일반인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고 고급제품
이 라는 이미지도 남길 수 있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더욱이 피오레는 시장잠
재력은 있지만 요즘 국내외의 전반적인 경기가 악화되어 매출이  떨어지고 있고, 하청을 받
고 있던 기 업이 몇 달 전 부도가 나는 바람에 주고객을 잃어 회사존폐의 위기에  놓여있었
다. 이런 형편이 었으니 뉴그린 백화점의 참가 승인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나 다름없었다.

그러기에 더더욱 새미는 이런 중요한 임무가 자신에게 맡겨졌을 때  믿을 수 없었다. 이 납
품에 성공만 한다면 회사가 당장 앞에 놓인 어려움을 극복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에
서의 자신 의 입지도 굳혀 어려운 집안  형편에 보탬이 될 수 있을 텐데. 일년  전에 사 년
동안 다니던 회 사가 부도났을 때 실직으로 인해 힘들었던 생각을 하자 덜컥 겁이 났다.

피오레는 지난 번 다녔던 회사와 비교하면  아주 작은 중소기업이었지만 기나긴 실직  생활
중에 겨우 얻은 회사였고, 이 곳에서는 전에 다니던 회사보다 필요한 인력이 부족하여 자신
의 디자 인을 상품화 할 기회가 조금이나마 주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이 잘못 되어 다
시 취직할 회 사를 알아볼  생각을 하자 앞이 깜깜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외국물을 먹은
유학파를 선호하기 때문에 이름 없는 중소기업 경력이 전부인 새미가 다시 직장을 얻는다는
것은 가망이 없었다. 일류대를 나온 사람들도 일자리가 없다고들 하던데.

이 회사도 일곱 달만에 아는 선배를 통해 겨우 얻을  수 있었다. 음식점 주방에서 밤낮으로
일하 시는 엄마. 내년이면 새한이도 대학에 보내야 하는데 아직 등록금도 마련하지 못한 상
태이다.

안돼! 세상에! 5년 전 그 날 일을 잊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이제 와서  다시 나를 기억조
차 못하는 석민 때문에 일을 망치다니. 이 무슨 악연인가!

“새미씨?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겁니까?”

조부장의 꾸짖음에 정신을 차린 새미는 자신이 다른 샘플 박스에 옷을 정리하고 있는 것을
깨 닫고 얼굴을 붉히며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이상한데, 품평회 때문입니까?”

조부장은 새미가 넋을 잃은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 그녀의 얼
굴을 자세히 살피며 되물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프리젠테이션에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거 감사드려요.”

새미는 얼굴에 서린 긴장을 지우기 위해 괜히 조부장에게 환한 미소를 띄어 보였다.

“무슨 소리! 새미씨 같은 예쁜 아가씨와 함께 일 할 수 있어 내가 더 좋았습니다.”

조 부장은 갑작스런 새미의 다정함에 놀라면서도 기쁜 듯 웃으며 새미의 어깨를 두드렸다.

바로 그 때, 어디선가 허스키한 저음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파고들었다.

“진새미씨! 오랜만이군! 나를 기억 못 하는 것은 아니겠지?”

헉! 이 목소리는… 설마!

새미는 가까이서 들려오는 석민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숨을 흠칫 들이 쉰 채 내쉬는 것도
잊고 빳빳히 몸을 세웠다. 한 순간 시간이 멈춘 듯 동작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움
직이지 않 았다. 새미의 귀는 5년이 지난 지금도 바리톤의 굵은 음색인 석민의 목소리를 생
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처럼 목에서 등줄기를 거쳐 허리까지 가벼운 전율이 스쳐 지나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미는 움직이는 동작 하나 하나를 슬로우 비디오로 찍듯 서서히 몸을 뒤로 돌렸다. 자신을
못 알아본 줄 알았던 석민이 품평회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새미는 멍하니 입
을 약간 벌린 채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차가운 열기를  발산하며 반짝이는 그의 눈과 마
주치자 새미 는 발끝까지 저미는 충격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석민은 팔장을 끼고 입구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검은 양복 정장의 세련미와 권위적일 정
도 로 강해 보이는 모습이 아울러져 결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었
다. 넓은 이마를 보이며 뒤로 넘긴 까만 머리칼, 타오르는  검은 눈동자. 마치 적을 향해 달
려들기 전에 기선을 제압하는 야생의 검은 사자처럼 보였다.

천천히 새미의 스마트하면서도 여성스런 모습을  위에서부터 감상하듯 흩어보던 석민의  한
쪽 입꼬리가 비틀어지며 위로 올라갔다. 순간 석민에게 넋이 빠졌던 새미는 그의 비웃는 듯
한 냉 소적인 웃음에 정신을 차렸다.

5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석민을 하루에 두 번씩이나 부딪치다니. 자신의 눈이 의심스
러 웠다. 여전히 그가 손만 까닥하면 달려갈 것처럼 넋을 잃고 바라본 조금 전 자신의 모습
이 떠오 르자 수치스러워 새미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쥐구멍이라도 들
어가고 싶은 당혹감에 석민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서 연
기처럼 사라질 수 만 있다면.

석민의 등장에 새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조부장은 마주 서 있는 두 사람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새미씨. 누구? 아는 사람입니까?”

새미가 대답을 하지 않자 옆에서 조부장이 답답한 듯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뉴그린 백화점의 강석민 이사입니다.”

조부장의 질문에 석민은 새미에게 향하던 시선을 조부장에게 돌리고 손을 내밀며  자신있게
자 신의 소개를 했다.

“예? 강석민이라… 아! 안녕하세요. 저는  피오레의 마케팅 부장인 조남우라고 합니다.  이번
납 품 때문에 왔죠. 새미씨와는 잘 아는 사이인가요?”

조 부장은 백화점 이사라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자기 소개를 하며 석민의 기분을 맞추려 노
력 했다. 이사라면 납품 결과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자리가 아닌가.

그 때서야 조부장의 존재를 기억해 낸 새미는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야지  생각하면서
도 빨리 도망가고 싶은 심정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석민과 자
연스럽 게 안부인사를 나누는 자신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를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 다!

석민은 새미의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조부장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글쎄요… 어떤 면에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하지만 잊지  못 할
사이 임은 틀림없죠.”

조부장이 아닌 새미가 듣기를 원하며 느릿하게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순간 새미는 시선을 들어 석민을 노려보았다. 뻔뻔스럽게, 조부장 앞에서 잊지 못할  사이라
니.

하지만 그녀를 향한 석민의 차가우면서 강한 암시를 지닌 도전적인 눈빛에 용기를 잃고 말
았다. 잠깐이지만 깊은 곳에서 작은 불꽃이 타오르는 섬광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생각
으로 석민 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던 악몽 속의 주인공이 환
한 대낮에 거리 를 걸어다니고 있어… 이건 악몽이야, 잠에서 깨면 없어질 악몽일 뿐이라고!

새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석민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석민은
그 런 새미의 동작을 즐기듯이 감상하며 여전히 그녀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조롱하듯 반짝이는 석민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새미의 속눈썹이 여성스럽게 파르
르 떨렸 다. 갑자기 석민의 눈빛이 짙어지며 약탈자처럼 번뜩였다.

새미는 석민의 강렬한 눈빛을 받자 온 몸의 신경세포가 생생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묘
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새미의 전신을 흔들었다. 미칠 듯한 숨막힘 속에서도 야릇한 기대감
이 배 근처에서 온 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다리에 힘이 빠진 듯 후들거려 견본품 상자에 팔을 기대고 다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구두를
내 려보았다. 그녀의 갑작스런 육체적 반응을 석민이 알아챌까 두려워..

석민은 여전히 새미에게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피오레의 샘플을 잠시 흩어보다 어깨
를 으쓱거리는 태도로 보아 의상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지나가는 말투로 잠깐 관심을
내비 칠 뿐이다.

“피오레라. 아직 벤처기업이죠? 하지만 샘플을 보니 튀는 색상과 디자인이 신세대에게는 꽤
어 필할 것 같더군요.”

조부장은 이때가 기회라 싶어 열심히 회사 자랑을 하였다.

“네! 작은 기업이지만 벤처이기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있죠! 유행에 민감한 변화를 쉽게 감
지할 수 있죠.”

조부장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고 석민은 새미를 향해 갑작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진새미양과는 너무 오랜만이라서, 차 한 잔 같이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안돼요.”

조부장과 새미는 동시에 대답했다.

새미는 석민과 편히 차 마시는 자신을 그릴 수 없었다.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석민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새미의 거절에 한 쪽 눈썹을  치켜 떴다. 왠지 다분히 연극처
럼 보 이는 동작이었다.

새미는 자신을 미친 사람 보듯 바라보는 조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거절을 했다.

“저… 오늘 회식이 있어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당혹스러운데 함께 차를 마시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새미씨. 회식은 신경 쓰지 말아요. 사장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게요.”

조부장은 석민의 눈치를 살피며 손까지 흔들어가며 황급히 새미를 말렸다.

“아닙니다. 회식이 있다면 참석해야죠. 다음에  분명 기회가 있을 겁니다. 진새미양!  다음에
다시 뵙죠.”

석민은 새미에게 만나서 즐거웠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뒤
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나가버렸다. 하지만 등을 보이기 전  그의 눈 속에서 일어서는 차
가운 번 뜩임을 새미는 놓치지 않았다.

다시 보자고? 왠지 불길한 예감에 새미는 추운 듯 부르르 떨었다. 그의 뻔뻔한 암시에 열기
가 눈 녹듯이 사라지며 대신 오싹한 한기가 새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
는지 새 미는 무의식중에 석민의 뒷모습을 좇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뒷모습은 여전히 멋
있어. 먹이를 앞에 둔 호랑이 같은 카리스마적인 눈빛도 여전하고. 그의 곁에 있으면 주위의
모든 것은 빛을 잃는다…

“새미씨. 강석민이 누군지 몰라요? 왜 이렇게 좋은 기회를 날리는 겁니까?”

조부장은 꾸짖듯이 소리치며 새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저 사람을 아세요?”

아직 예민해져 있는 신경을 무시하려 애쓰며 새미는 다시 샘플을 정리하면서 조부장의 대답
에 귀를 기울였다. 만약 석민이 뉴그린 백화점의 이사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무리 승
진이 걸린 일이라 할지라도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새미씨가 강석민과 아는 사이라니 의외인데. 왜 강석민과  아는 사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
까? 나도 그 사람 소문은 들은 적 있어요. 하성그룹 셋째아들로 유학파라죠. 경기가 엉망인
요즘 같 은 때 고전을 면치 못하는 다른 백화점과는 달리 뉴그린 백화점이 승승장구하는 것
도 다 저 사 람 덕분이라지, 아마. 믿을 수 없군! 뉴그린 백화점의 실세를 새미씨가 알고 있
다니. 분위기로 봐서는 보통 사이가 아닌  듯 싶은데. 새미씨가 자신만만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군요.”

새로운 정보에 놀라는 새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부장은 자신의 얘기를 계속 하였다.

강석민이 하성그룹 회장의 아들이라니. 뉴그린 백화점도 하성그룹의 계열사 중의 하나지. 완
전 히 황태자잖아.

새미는 5년 전 잠깐 만났던 그가 ‘강석민’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 뿐 그에 대해 아는 것
이 없었다. 새벽에 낯선 오피스텔에서 깨어 보니 옆에 석민이 허리까지 시트를 두르고 벌거
벗은 채 잠들어 있었다. 순간  전날 밤의 생생한 기억이 스치자  혼란스럽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마주 하기가 수치스러워 도망치다시피 오피스텔을 빠져 나왔다. 그 후 그 충격에서 벗
어나기까지 너 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 때  그 모든 것이 여자를 홀리는 저 눈빛 탓이야.  내가
그렇 게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게! 저 망할  인간 탓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오랜 친구를 만
난 듯이 저 렇게 담담할 수 있지. 강석민에게는 아무 일도 아닐 수도 있겠지. 그 날 일이….

함께 춤추자는 석민의 말에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멍히 앉아있는 새미에게  석민이
손을 내밀었다. 처음 새미가 석민의 눈빛에서 본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따스함이 스
민 열기였 다. 그 눈빛에 넋을 잃어 최면에라도 걸린 듯 새미는  석민이 내민 손을 잡고 홀
로 나와 그에게 몸을 기댔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혀 강석민의 어깨에 기대 몸을 흔들며  새미는 아득해짐을 느꼈다. 평
소 주량보다 많이 마신 술도 한 몫 거두었음이 틀림없다.

석민이 새미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면서도 반항하기보다는 자신의 온 몸에 흐르
는 전율에 몸을 떨 뿐이었다. 석민의 가슴에 놓인 새미의 손에 석민의 빠른 심장 박동이 느
껴졌다. 이 남자도 자신과 같은 심정이라는 생각에 새미는 더욱 황홀해졌다.

사람들이 홀로 나와 빠른 댄스 음악에 맞혀 격렬한 춤을 출 때야 비로소 새미는 음악이  바
뀐 것을 알았다.

여전히 석민의 몸에 기대고 있던 새미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석민의 눈을 보니 그 속에  알
수 없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금방이라도 불 살릴 것 같은 눈빛
을 본 순간 새미가 조금이라도 현명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갔어야
옳았다.

하지만 새미는 앞으로 다가올 일에 막연한 불안을 감지하면서도 처음 느끼는 흥분에 기대감
마 저 느끼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석민의 강렬한 눈빛에 사로잡힌 듯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석민과 소개를 하고 그의 동행과  새미의 친구들은 자리를
합친 후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석민의 오피스텔, 그의 품에서 깨어난 새미는 기겁하여 도망쳐 왔다.

악몽과도 같은 6주를 보낸 후 석민을 다시 찾아 그의 오피스텔을 방문하였을 때는 이미  다
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날 저녁, 새미는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회식에 참석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회사 사람들은 그 동안 모두 가족처럼 편하게 지내어  왔다. 새미가 프리젠테이션으로 긴장
한 것을 알고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부장만은 그런 새미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
았다.

자물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새미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부엌이  달린 5평도 안 되는 작
은 방이지만 이 방도 피오레에 취직이 되어 월세로 겨우 얻은 방이었다.

그 전까지는 지금 유럽 유학 중인 주희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새미가 가지고 있는 옷
대 부분도 주희가 입다 지겨워 버리려 하던 옷이다. 사실  오늘 입은 유명 디자이너의 옷도
주희의 옷이다. 하루하루 살아남기에 바빠 패션 디자이너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패션
이나 유행 따위는 뒤돌아 볼 여지가 없었다.

벽에 쓰러지듯 머리를 기대고 앉아 두 눈을 감으며 휴식을  취했다. 오늘 하루는 더더욱 전
쟁처 럼 느껴진다. 이대로 땅으로 꺼져버렸으면…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새미는 오늘 같은 날은 누구와도 통화하고 싶지 않았다. 수화기를 받지 않자 전화벨이 끊기
지 않고 계속 울렸다. 끙! 누구지?

“진새미입니다.”

어쩔 수 없이 기어들어 가는 작은 목소리로 전화벨을 받았다.

“왜 이리 힘이 없어? 프리젠테이션 망친 거니?”

쾌활한 음성이 수화기 사이에서 새어나왔다.

소꿉 친구인 하겸이다. 아무리 오래된 친구 라지만 눈치 없는 것은 알아주어야 한다니까. 하
겸 의 타이밍 감각은 거의 제로 수준이야.

“그래… 저.. 하겸아! 나 지금 통화하고 싶지 않아. 내가 다음에 다시 걸게.”

새미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하자 수화기 반대편에서  터져 나오는 큰 목소리가 귀를  울렸
다.

“잠깐! 그렇게 기운 없을 줄 알았어. 여기 너희 집 앞이야. 당장 나와.”

하겸은 새미의 거절은 예상했다는 듯이 자기의 말만 마치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야! 김하겸!”

새미는 화가 나 소리를 버럭 질렀다.

“뚜뚜뚜”

이미 전화기는 끊긴 상태이다. 새미의 입에서 한 숨이 새어 나왔다. 한참을 전화기만 노려보
다 새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다 할 수  없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천천히 방문을 나섰
다.

하겸과는 초등 학교 때부터 함께 지내온 친구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파산으로 힘들어 할 때,
직 장 일로 고민 할 때 등 언제나 곁에서 새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던 친구이다. ‘진지’와
는 거리 가 멀고 항상 농담과 분위기 메이커로서 인기가 많다. 군대  갔다 온 후 아직 대학
교를 다니고 있다.

방을 나오니 방문 앞에서 하겸이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새미에게 윙크를 했
다.

“누가 노처녀 아니랄까봐 방구석에서 바닥만 긁고  있냐? 아무리 얼굴이 무기 라지만  요즘
세상 에 부엌문은 활짝 열어놓고.”

하겸은 가장 오래된 친구지만 한번도 새미의 방안까지는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새미의 병
적 일 정도의 남성기피증을 하겸은 잘 이해해 주고 있었고,  그러한 무언의 배려가 두 사람
의 우정 을 거의 15년 넘게 지탱해주는 고리가 되고 있었다.

새미는 자신이 빠져 나온 방문에 자물쇠를 채우면서도 하겸을 노려보았다.

“오늘 정말 피곤해. 너랑 놀아줄 시간 없어. 자칭 왕자인 너야말로 그 나이에 여자  친구 하
나 없어 매일 나를 괴롭히니?”

새미는 쌀쌀맞게 하겸의 말을 받아쳤다.  갑자기 누구에게라도 말싸움을 걸고  싶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

“오빠 같은 멋진 남자가 너에게 황금 갚은 시간을 내주는 걸 영광으로나 여기라고. 그만 얼
굴 좀 펴라. 눈 돌아간다. 가자!”

하겸은 새미의 손에서 열쇠를 받아들고 그녀를 대신해서 부엌문을  잠갔다. 새미의 앞에 서
서 우아하게 대문을 열고 그녀가 먼저 나가도록 비켜섰다.

“오늘은 아름다운 숙녀를 위해 소신이 모시겠나이다.”

허리를 반쯤 숙이고 손을 앞으로 내민 채 하겸이 정중하게 말했다. 중세 시대, 아름다운  숙
녀를 위해 충성을 맹세하는 중세의 기사처럼 보였다.

“넌 정말 항상 네 식이구나.”

새미는 앞서 나가며 여전히 뽀루퉁 해 있다. 하겸은 대문을  닫고 나와 새미의 어깨에 팔을
두르 며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실은 설레지?”

새미는 헛웃음을 치며 따라갔다. 너를 누가 말리니.

“그래. 심장이 멎을 정도니 제발 그 팔 좀 치워줄래?”

새미는 하겸과 나란히 길을 걷으며 생각한다. 석민의 기억 따윈 잊고 아무 생각 없이  살자.
이 미 5년의 시간을 석민의 그림자에 갇혀 살았잖아. 더 이상은 싫어!

새미는 길 건너편에 서있는 고급승용차 안의 누군가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
한 채 평소보다 과장된 몸짓으로 하겸에게 매달렸다. 차안의 남자는 이를 갈았다. 여전히 그
녀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스스로를 저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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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며칠 후,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새미는 사장의 호출에 급히 사장실로 갔다. 사장실로  향하는
새 미의 심정은 착잡했다. 사장의 작은 사무실에는 장식장 하나 없이 설렁한 책상만이 자리
하고 있었다. 물론 몇 년 동안 흑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직원들 월급을 주고 남는 돈은 거의
전부 재 투자하는 단계라 아직 실내 인테리어까지 여력을 쏟지 못하고 있었다.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사장은 새미를  보자 서둘러 의자에 앉았다.
새 미는 불길한 예감에 책상 앞에 서며 긴장했다.

“새미씨. 어서 와요. 어제 품평회 결과가 나왔는데 후리상사에게로 돌아갔다고 하더군.”

“그래요? 저… 죄송합니다. “

새미는 실망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혹시나  하는 작은 기대는
가지 고 있었는데… 너무나 죄송스럽고 앞날이 막막해져옴을 느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미안하다고 끝날  일이 아닌 거 새미씨도 잘  알잖아. 어음이 막혀 지금
회사 상태가 말이 아니야. 이번에 백화점 건이 유일한 기회였다구.”

“……”

누구보다 회사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새미는 죄송스러움에 더욱 할 말을 잃었다.

“이런 말 실례인 줄 알지만…”

사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새미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조부장이 그러는데 새미씨가 뉴그린 백화점의 강석민 이사를 개인적으로 잘 안다면서?”

갑자기 사장의 어투가 부드러워졌다.

“예?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냥 옛날에  잠깐 알던 사이에요. 아니, 안다고도 할  수 없어
요.”

사장의 뜻밖의 말에 놀라 새미는 강력하게 부인했다. 사장은 손을 내저어 새미의 말을 가로
막 고 자신의 말을 계속 이었다.

“새미씨.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요. 처음부터  뉴그린에서 우리 회사에 품평회 제의를  했던
것이 믿기지 않았어. 우리 회사가 잘 알려진 회사는 아니잖아. 그때 백화점 쪽 제의가  진새
미씨를 프 리젠테이션에 내보내라는 거였어.”

새미는 그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사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무슨 뜻이지? 설마?

사장은 애원하는 말투와 강압적인 눈빛으로 새미를 설득했다.

“조부장의 얘기를 들으니 그 조건이 이해가 가더군.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준 것이 다 새미
씨가 우리 회사에 있기 때문인 거 같아. 둘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는지 모르지만  도와줘요.
새미씨! 이번 기회만 넘기기만 하면 우리 피오레도 문제없어.”

사장은 썩은 동아줄이라고 잡는 심정으로 새미에게 더욱 매달렸다.

“사장님. 아니에요. 사장님이 잘 못 아신 겁니다. 전 그럴 힘이 없어요.”

석민과의 만남을 피하려 힘들게 변명하는 새미의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맺혔다. 얼굴이 화
끈거 리듯 뜨거워지고 눈앞이 아득해지는 거 같았다. 만일 사장의 말대로 석민이 자신 때문
에 피오 레에 기회를 준거라면? 아니야. 석민이 왜 그런 일을… 아냐!! 석민을 다시 만난 이
후로 악몽은 계속 되고 있었다.

“제발. 새미씨! 한번 시도라도 해 봐요. 밑져야 본전이잖아.”

새미는 사장의 간곡한 부탁에 말은 해보겠다고 약속하고 사장실을 나오면서도 다시  석민을
만 날 생각에 앞이 깜깜했다. 단지 5년 전 잠시 스쳐  지나간 인연에 불과해서 이런 부탁을
할 사이 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다시 그를 마주한다는 생각만으로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이제 와서 그에게 찾아가 피오레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면 나를 얼마나 뻔뻔
한 여자로 알까. 혹 5년 전 일을 빌미로 협박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번  품
평회를 망친 것도 모두 나의 프리젠테이션에서의 실수 때문이라면… 책임을 질 사람도 나밖
에 없다.

무엇보다 피오레는 자금사정으로 여기서 주저앉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업이었다. 국내 경기
악 화로 하청을 주던 회사가 부도로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문제없었을 기업이고, 앞으로 2-3
년 정 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젊은 층의 감각에 맡는 인기메이커로 성장할 능력도 충분한
기업이었 다. 지금 피오레는 흑자 도산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마저 쫓겨난다면 더 이상 엄마를 볼 면목이 없었다. 다시 직장을 구하기
도 하늘에서 별 따기이다. 내가 원하는 디자이너로서의 삶은 앞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엄마 혼자 힘으로 새한이 대학교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무리였다. 비록 거절당한다 할지라
도 그냥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지난번 우리 회사의 디자인을 칭찬 한 것으로 보아 그 가
치를 설명한 다면 설득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이제 겨우 수습 디자이너 수준인 자신을 품평회 대표로 보내라는 백화점 쪽 제의가
자 꾸만 마음에 걸렸다. 석민이가 시킨  일 일까. 말도 안돼! 벌써 5년도  지난 일이고 겨우
하룻밤 뿐인걸. 절대 그럴 리 없어. 내가 피오레에서 일하는 것을 그가 어떻게 알았겠어.

너에게 더 이상 갈 곳도 없잖아. 두려워하지마. 5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 상처에서 벗
어 나지 못한 거라면 넌 바보야. 한번의 실수로 평생 겁에 질려 살거니. 엄마와 새한이를 생
각하자 고. 넌 디자이너로 성공하고 싶잖아. 이 회사가 마지막  기회야! 굳은 결심으로 마음
을 다지며 아니, 자신에게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며 새미는 뉴그린 백화점으로 향했다.  5년
전 하룻밤의 쾌 락으로 지난 시간을 죄책감과 아픔 속에서  살아왔다. 이미 너무나 많은 대
가를 치렀어. 더 이상 두려움과 도망은 나의 몫이 아냐!!

이사실 비서에게 면담을 요청한 후, 새미는 석민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점점 용기를 잃어갔
다. 지금이라도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피오레의 과거  매출액 자료와 성장 추세, 최
근의 디 자인 등 준비해온 자료를 다시 한번 검토해 보며 생각을 정리해 보려 노력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이 중요해. 조금이라도 재무 지식
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자료만으로도 피오레의 가치를  쉽게 깨달을 거야. 5년 전에
스쳤던 여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피오레의 대표로 이 자리에 있는 것임을 잊으면 안돼. 며
칠 전 프리 젠테이션 때처럼  긴장하고 기죽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둘 모두에게 유리한
계약을 성사시키 는 것 일 뿐! 새미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계속 중얼거리며 떨리는 가
슴을 진정시키려 애썼 다.

하지만… 새미는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자료 화일을 구겼다.

석민과 마주할 수 없다는 회의감이  시간이 지날수록 새미의 머릿속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잘못 온 거야. 이런 일로 그를 찾아온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어. 그 날 차 한잔 마시자는 제
의도 거절 한 나를 만나 줄리 없잖아. 비웃음을 사지 않는다면 다행이지…

드디어 새미는 포기하고 가방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때 여비서가 쌀쌀한 목소리로 들어가라고 알려 주었다.

새미는 방망이질치는 가슴을 달래려 숨을 깊게 내쉰 후, 접혀진 옷을 털며 이사실로 들어갔
다.

이사실 문을 열자 정면으로 자신을  주시하며 책상에 거만하게 앉아있는  석민과 마주쳤다.
그의 뒤로 고상한 남색 빛을 띄는 유리창이 세상으로부터 사무실을 차단시키고 있었다.

석민은 긴 원목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일어나지도 않은 채 거만하게 의자에 앉아 새미를 쳐다
보 고 있었다. 회색 자켓을 걸친 석민은 회전의자에 기대어 두 손을 깍지 낀 채, 뜻밖이라는
듯 새 미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서른 두 살의 나이에 모든 것을  가진 당당함과 이미
세상을 알아 버린 냉소가 뒤섞여 저항하기 어려운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세련된 자켓 사이로 뿜어내는 야성적인 힘과 거만함이 새미를 더욱 주눅들게 했다.

새미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하며 석민의 눈을 피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 속의
신 경이 마구 엉킨 듯해  잠깐이라도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문득 한번도 그와
대화다 운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저 이로 인한 회의
와 갈망 속 에서 살면서도 이번이 겨우 세 번째 만남이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확 트인 창 밖으로 한강을 지나가는 유람선이 보였다.  반대측면은 어두운 색상의 대리석으
로 되어 있고, 실내 구조는 현대적이고 단순한 디자인의  가구들로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세
련되고 중후한 미를 살리고 있었다. 벽에 미술작품이 걸려 있었고, 창가에 몇 그루의 열대목
이 놓여 있 긴 했지만 차갑고 사무적인 분위기에 인간미를 심어 주진 못했다.

새미는 자신이 사무보조원자리를 면접 보러온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애송이 같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나마 자신을 이 곳으로 이끌었던 용기조차 석민의 탐색하는 듯한 눈초리에 사그
라지는 것을 느꼈다.

새미는 158센치의 작은 키였지만, 완벽한 몸매를 지녔다. 어깨에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윤
기 나는 검은 머리와 유난히 하얀 피부에 약간 눈꼬리가 올라간 커다란 아몬드형 눈이 무척
매력 적인 얼굴이었다. 눈을 크게 뜨면  얼굴에 눈만 가득한 듯 보였다. 유혹하듯  튀어나온
작지만 도 톰한 입술이 오늘은 꼭 다물고 있어 고집스러워 보였다.

보랏빛 블라우스에 검은 색 정장을 걸친 그녀는 여성스럽고 너무나 작아 남자로부터 보호해
주 고 싶은 충동이 일게 했다. 사무실 여기저기로 헤매던  시선은 촉촉한 빛을 발하며 흔들
리고 있 었다. 새미는 불안한지 손목을 계속 비틀며 손가락을 쥐어짜고 있었다.

새미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석민에게 얼마나 매혹적으로 비치는지  알지 못했다. 석민은 자
신의 사무실 안에서 떨고 있는 새미의  모습을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양 뚫어지게  바라보았
다. 5년 동 안이나 내 꿈속을 점령하고 있던 여인…

저 여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무리 찾아도 어디 사는지 단서  하나 알아내지 못했을
때 차 라리 나의 환상이 아니었나  싶었지. 아니, 흔적은 남아 있었다.  침실 가득한 그녀의
체취와 향 기, 침대 위에 떨어뜨리고 간 목걸이… 그 목걸이 마저 없었다면 정말 꿈이었다고
생각했을 지 도 몰라. 아름답고 환상적이지만 덧없는 꿈처럼 새벽이 오자 사라져버렸지.  하
지만, 마침내 나 는 그녀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제 그녀가 제 발로 나를 찾아왔다!

길 잃은 양처럼 겁에 질려서…

후! 감상은 금물이다. 새미가 왜 나를 찾았는지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석민은 그
녀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은 바보 같은 자신의 충동을 비웃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울림을 숨기고 일부러 냉정함을 가장했다. 새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기가 지쳤다는
듯 그가 따분해하는 어조로 먼저 말을 건넸다.

“이 곳까지 친히 찾아와 준 것을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나를 찾아오기를 5년이나 기다렸지.
하 지만 이제서야 오다니, 너무 늦은 감이  있는 것 같군. 나와는 인사도 하기 싫어하는  것
같았는 데, 무슨 일로 왔는지 물어도 될까?”

새미는 끝내 함구하리라 맹세했던 5년 전  일을 꺼내는 석민에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 거렸다. 여전히 시선을 바닥에 두고 그의 눈과 마주치지 못했다. 이 완벽한 타인과  누
구보다도 가깝게 서로를 공유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저기… 그러니까… 그 때.. 아니, 잘 지냈어요?”

어? 이게 아닌데. 새미는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석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분히 조작된
몸 짓으로 한 쪽 눈썹을 치켜 떴다.

“오우, 안부를 묻으러 온 거 였군.”

느릿한 어조로 석민은 말을 이어나갔다.

“백화점에서 빼 먹었던 인사가 갑자기  생각나서 늦게 나마 예의를 찾으러  온 거였나. 5년
전에 도 작별 인사 없이 도망갔지? 이제 보니 어릴 적에 가정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군.”

새미는 비꼬는 듯한 석민의 말투에 놀라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조 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한  어조였지만, 석민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순간 새미는 숨을 흠칫 들이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5년 전 일을 그냥 넘어가
지 않을 생 각인 모양이다.

“내 가정 교육에는 아무 문제없어요. 나는… 말장난하러 온 게 아니라고요. 그 때는 너무 뜻
밖이 라… 저기… 제가 여기 온 이유는 회사 일로…”

예상치 못한 석민의 태도에 새미의 목소리는 약하게 떨리고 말더듬은 한층 심해졌다.

“말 더듬는 버릇까지 있다니, 고쳐야 할 습관이 많은데. 새벽에 야반도주하는 버릇은 여전한
가?”

석민은 갑자기 차가운 노기가 깃 든 목소리로 새미를 다그쳤다.  깍지 낀 손을 풀며 주먹으
로 책 상을 내리치려는 듯 강하게 쥐었다. 아침에 잠에서 깬 후 새미가 사라진 것을 알았을
때의 당혹 감과 분노가 떠오르자 아직도 화가 치밀어옴을 자제할 수 없었다. 더욱이 새미의
연락처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기막힘이란! 석민은 주먹 쥔 손의 힘을 빼
지 않고 움직이 지 않은 채 흔들림 없는 말투로 새미를 더욱 몰아갔다. 석민은 정중하고 사
무적인 새미의 가면 을 벗기고 싶었다.

“넌 그 날 처녀였어. 말해봐! 일부러 처녀성을 떼기 위해 나를 택한 건가?”

새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렀다. 핸드백을 쥔 그녀의 손가락이  뼈마디가 보일 정도가 하얗
게 변해갔다. 감히…

“함부로 지난 일을 들먹이지 말아요. 나에게  다가온 것은 당신이 먼저였잖아요. 마치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라고 몰아세우다니! 이 이중인격자!”

새미는 발끈해서 이곳에 온 이유조차 잊어버리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새미는 감히 입밖에
꺼 내기도 두려운 그 날의 만남을 심심풀이 땅콩인 양 계속 입에 담는 석민의 무심함과  비
열함에 화가 나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말았다.

사무실 안의 샹들리에 조명을 받아 화가 난 새미의 얼굴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새미를 바
라보 던 석민의 눈빛이 매혹 당한 듯 짙어졌다. 석민은 그 모습에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
았다. 자 연스럽게 흘러내리는 까만 머리카락이 조명 빛을  받아 반짝이자 야성적이도록 섹
시해 보였다. 분노로 반짝이는 눈,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과 약간 벌어진 입술. 그 입술 사이
로 빨라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돌연 사무실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뀐 것을 깨닫고 새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침묵
을 잘 못 오해한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이 곳에 온 이유를  말하기도 전에 쫓겨나는 거 아닐까.  마음 같아서는 뺨이라도 한
대 갈 기고 여기를 나가고 싶지만, 회사 사람들의 생계가 나에게 달려있는걸. 새미는 자신의
울컥하는 성질을 후회하며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기가 죽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했다.

“미안해요. 5년 전 일은 다  잊었어요. 그 날 일은 실수였고,  저는 너무 오래돼서 기억조차
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과거는 잊고 사무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성인이라고  믿어
요.”

석민은 자리에서 느리게 일어나 새미에게 눈을 고정시킨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눈 동자가 한층 위험한 빛을 띄고 있었다. 이제서야 나타나  겨우 그 일이 실수였다고 말하
면 다인 가! 얼마나 많은 밤을 그 기억만을 끌어안으며 잠 못 이루었는데. 나는 그 밤을 묻
어둘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럴 리가! 필요하다면 기억을 되살리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어. 나는 아직도 그날 밤을 생
생 히 기억할 수 있거든. 너의 느낌이 얼마나 애절했는지.”

애무하듯 석민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그는 하얀 이까지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눈가까지
미 친 미소는 아니어서 눈에 어린 냉기를 지우진 못했다.

새미는 숨을 삼키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석민과의 재회가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이
런 식으로 그 날 일을 물고 늘어질 줄은 몰랐다. 할 수만 있다면, 해도 된다면  자리를 박차
고 나가 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회사 사람들, 우리 엄마, 새한이…

새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석민을 보고 겁에 질려 뒷걸음치며  말을 이었다. 석민에게 여기
온 용건도 말하지 않은 채 도망 갈 수는 없었다.

“제발 부탁해요. 나는 이곳에 공적인 일로 왔어요. 품평회 결과가 후리상사로 결정됐다는 소
식 은 들었어요. 우리 피오레는 아직 성장기에 있는 회사지만  몇 년 안에 업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기업이 될 거예요. 우리 회사의 제품을 파는  것이 절대로 당신의 백화점에 손해를
입히지 않을 거예요. 제가 준비해 온  자료를 보시고 한 번 고려  해 주세요. 우리… 친구가
될 수도 있었잖아 요.”

석민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자신의 긴장도 지우기 위해 새미는 속사포처럼 쉬지 않
고 말을 했다. 새미는 그가 자신이 준비해온 자료를 잠깐이라도 보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
했다. 자료만 본다면 사무적인 분위기로 바꾸고 석민을 설득시킬 수도 있으리라.

“하하… 친구라…”

석민이 소리내어 웃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새미의 귀에도 공허하고 어색하게 들렸다.

“나도 그 날 밤 만남을 무어라 정의를 내릴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친구라고는 생각도 못했
는 걸. 우리는 그 날 친구라 할만큼 얘기는 별로  나누지 못했잖아. 그럴 시간이 없었지. 대
화 말고 다른 일에 너무 바빠서.”

석민은 도망가는 새미를 비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소파에  앉혔다. 잠깐이지만 그녀와 닿
은 자신의 손에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만 뒤로 가고 의자에 앉지 그래?”

새미는 석민의 접촉에 흠칫 놀라면서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속으로 원망했다.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석민이 여기에서 나에게 폭력이라도 행사할까봐 이렇게 떨고 있니.

석민은 자신도 상석에 앉은 후, 옆에 있는 인터폰을 눌러 비서에게 차를 부탁했다.

“제발… 우리로써는 중요한 일입니다. 한 번만 읽어 봐 주세요.”

얼굴이 빨개지고 화가 났지만 새미는 계속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의 조금 전의 말
을 못 들은 척하고 가방에서 준비해 온 자료를 꺼냈다.

“피오레에서 미인계를 쓰기로 한 건가. 하지만 이미 결정이 났어. 피오레가 장래성  있는 기
업이 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아직은 위험부담이 너무 많아. 우리 뉴그린은 최고만 쓰기로 유
명한데 자칫하면 그 명성에 누가 될 수도 있잖아.”

어느새 석민의 어투도 사무적으로 변해  있었다. 석민은 새미가 내민  자료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거절했다. 왼 쪽 다리를 반대 편 다리에 꼬고 딱딱하게 앉아있는 그의 모습이 새미
를 더욱 움츠려 들게 했다. 새미가 이 남자를 잠깐이나마  알았던 적이 있었나 자신에게 되
묻을 정도로 거만하고 차가운 모습이었다.  저런 어투와 고자세로 이사회에  참석하면 다른
이사들은 기가 죽 어 아무 말도 못 하겠는걸.

하지만 고압적인 분위기에 질 수는 없다!

“우리 옷을 보았잖아요. 질감, 색상, 디자인 모두가 최고예요. 외국 제품을 모방하는 다른 기
업 들과 비교해 볼 때 참신성과 아이디어만큼은 우위예요.”

새미는 자료를 펼치고 사진의 디자이너를 가리키며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자신의 내면의 흔
들 림은 무시한 채.

“글세… 다른 이사들은 그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던데. 이것으로 이 얘기는 그만 하지.”

석민은 새미의 열성에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새미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막막함을
느 꼈다. 그가 자료가 아닌 새미를 주의 깊게 살피며  새미의 열정적인 음성과 반짝이는 눈
빛을 음 미하고 있음을 새미는 눈치채지 못했다.

새미는 예상은 했었지만 석민의 무심한 태도에 질려 어깨에 흘러내린 머리를 세게 뒤로 넘
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카락이 날리며 은은한 향기가 석민이  코를 자극했고 새미의 입
술은 피라 도 맺힌 듯 서서히 새빨갛게 부어 올랐다.

새미를 바라보던 석민의 눈에 서린 냉기가 갑작스럽게 타오르는  열기로 변했다. 그의 까만
눈 동자에 번개 불 같은 섬광이 스치고 지나가며 석민이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거칠어지는
호흡 을 잡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

“나는 5년 전에 우리들이 시작했던 얘기를 하고 싶은데. 한번이라도 내 생각이 나던가?”

돌연 강렬하게 변한 석민의 눈빛에 새미는 온 몸에 스치듯 지나가는 야릇함을 느꼈다. 사무
실 안의 공기가 갑자기 더워진 느낌이었다.

새미는 잊고 있던 여성으로서의 자각이 깊은 곳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것을 무시하려 애쓰며
오 직 회사의 사활이 걸린 협상에만 집중하려 노력했다. 석민의 눈빛 하나만으로 익숙지 못
한 육 체적 동요가 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자 새미는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아직도 이 남자
에게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너 새미 맞니!

펼쳐진 자료를 접어 석민에게 건네는 새미의 손이 어렴풋이 떨리는 것 같았다. 석민의 질문
을 무시하고 새미는 부탁을 계속 했다.

“한 번만 계획서를 봐 주세요. 우리 회사에게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요. 2년 정도만 넓게
본 다면 좋은 투자기회라는 것을 알 거예요. 제발…”

새미의 목소리가 애원하듯 들려왔다. 작게 기어드는 여성스런 음성이 석민의 귀를 간질이고
얼 어붙은 가슴까지 녹이고 있었다. 석민의 입술 언저리가 무언가를 참기 어려운 듯 실룩거
렸다.

석민은 새미를 한참 쳐다보다 졌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새미가 사무실에  도착한 후 줄곧
그녀 에게 향하던 눈길을 처음으로 서류로 돌려 자료를 받아들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석민이 서류를 보는 동안 침묵이  흐르고 새미는 불안한 지 다시  손목을 비틀기 시작했다.
이상 하게도 지금의 침묵이 조금  전 석민의 냉소보다 새미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연이라 도 한번쯤 다시 만나기를 기도하면서도, 혹 다시  만날까 두려움에 시달렸던 지난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스무 해 동안 지켜오던 새미의 신념을 한 순간 무너뜨린 바로 그 남
자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변함없이 그녀를 뒤흔드는 매력을 가지고.

자료를 살피는 석민을 훔쳐보며 새미는 여전히 그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연그럽게
흘 러내린 머리카락, 짙고 까만 눈썹, 윤곽이 뛰어난  이목구비에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긴
손가락, 육감적인 입술. 저 입술의 감촉이 어떠했지… 뜨겁고  부드럽게… 세상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 사이 비서가 차를 내려놓고 나갔다.

시간이 꽤 흐른 후, 석민은 자료를 무심히 넘기며 지나가듯 물었다.

“애인은 있어?”

“예? “

석민의 갑작스런 질문에 놀란 새미는 새로 생긴 습관인 양 말을 더듬었다.

“아니.. 저 .. 지금은.. 그럼요. 제 나이가 몇인데요.”

거짓말이었다. 새미는 석민과의 일이 있은 후 항상 남자에게 거리를 두었고, 집안을  이끌어
가기 위해 그 동안 남자를 사귈 시간이 없었다.

“성장 가능성이 많은 기업인 건  인정하지. 하지만 요즘 자금 사정이  엉망이라고 들었는데,
제품 을 생산 할 여유는 있는 거야?”

자신의 대답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회사사정으로 화제를 바꾸는 석민의 질문에  순간
당황 한 새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회사가 제품을 생산할 자체 능력이 있다면 뉴그린에 제품을 납품하는 대신  백화점 내에서
의 자리를 내줄 수는 있어. 우리 쪽에서는 자릿세와 관리비를 받는 거지.”

석민의 절제되고 강한 목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울리고 있었다. 그는 자료를 내려놓으며,  새
미의 작은 움직임까지 헤아리려는 듯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순간 새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석민의 말을 되새긴 후에서야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야
호! 됐어! 새미는 재빨리 대답을 했다.

“감사합니다. 결코 실망시키진 않을게요.”

새미는 자릿세와 회사의 현 자금사정을  계산해보며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고려해 보았다.
그 정도는 가능 할 거야. 안 되더라도 가능하게 만들면 돼!

새미는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느라 석민의 눈 속에 서린 위험스럽게 빛나는 단호함을 알아채
지 못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고요? 우리 회사의 형편을 고려해 약간의 시간만 준다면 우리 사장님은 어떤 조건
이 든 O. K할 거예요.”

새미는 반쯤 성공했다는 안도감에 싱긋 웃기까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뉴그린의 자리라면
훨 씬 좋은 제안인걸. 계약상의 조건쯤은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된 이상 문제될 수 없어.

“아니,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