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으로 가는 길은 한산했다. 기사가 운전해 가는 차안에서 간격을 두고 심어져 있는 가로
수들을 보았다. 너무나 정확한 간격과 똑같은
키와 가지들 푸른 잎새들은 마치 출근길 사람들의 모습 같았다. 똑같은 정장에 서류를 넣은
가방을 들고 무표정한 얼굴들을 하고 회사로
가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 사람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시간에 쫓기는 듯한 표정들 아침부
터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은 표정들 회사에
가기 싫은 표정 등등 여러 가지 표정들을 하고 있다. 지금 스치듯 지나가는 가로수들도 자
세히 본다면 제각각 뻗은 가지 손들이 있고
누가 더 무거운 잎들을 들고 있는 지 경쟁하듯 덮여 있는 모습들도 다 다르게 보인다.
항상 바쁘게 살아야 하는 보희에게는 지금 시간이 쓸데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생각들을
할 여유란 것이 있어서 좋았다. 혜성 그룹에서
일년 째 일하고 있는 그녀는 물론 이 일말고도 할 일은 태산이었지만 회장 비서실에서 막내
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일이란 것이 회장의 둘째아들이 캘리포니아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이번에 완전히 돌아오는
데 공항에 가서 그녀보고 모셔 오라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비서 자리에
취직되었고 일년이지만 뭐든지 빨리 배우는 성격
때문인지 그녀의 실력을 인정받고 있어서 그냥 하나의 과정이려니 생각할 뿐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회장의 아들이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회장의 외모
를 생각하니 그 둘째 아들도 외모는 영 아닐
것 같았다. 회장은 160cm의 짧달 막한 키에 둥글둥글한 체형이었고 얼굴도 동그란데 머리
까지 대머리였다. 표정은 욕심이 하나
가득이었다. 뭐 부모의 피를 똑같이 닮을 수는 없지만 첫째 아들인 황용민 상무는 정말 똑
같이 생겼고 막내딸은 어머니를 닮아서 인지
귀엽고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였다. 옛 말에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은 어머니를 닮는다고
했는데 성격말고 외모도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고약한 성미의 아들이 연상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벌써 공항 안으로 진입했다. 옷매무새를 만질 시간도 없이 부랴부랴
차에서 내렸다.
“김기사님, 금방 나올 테니까 딴데 주차하지 마시고 저쪽에서 대기해 주세요.”
말하면서 보희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비행기는 도착했을 것이다. 지연이 되지 않은 이상. 회사에서 출발하고
얼마 가지도 않아 시내에서 접촉 사고가
생긴 것이었다. 물론 양방에 책임이 있었지만 30분의 실랑이 끝에 해결을 보았다. 그래서 결
국 15분이 늦어 버렸다.
기다리다 가족 내력처럼 화가 나서 그녀에게 불똥이 튈까 봐 걱정이었다. 잘잘못을 따지기
도 전에 불호령부터 내는 회장의 성격을 본다면
역시 가족인 그 아들도 똑같은 행동으로 그녀에게 화를 낼 걸 같았다. 뛰어도 좁은 치마 때
문에 뛰는 게 쉽지가 않았다. 차라리 바지
정장을 입을 걸 하고 후회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말이다. 에스컬레이터
를 날 듯이 뛰어 올라 갔다. 평일이라도
사람들이 만만치 않게 있었기 때문에 앞의 사람들에게 연신 ‘실례합니다.“를 해야 했다.
숨을 헐떡이며 출국 장소로 가서 전광판을 보니
이미 비행기는 들어 왔다. 그것도 5분 빨리 20분전에 말이다. 평소엔 그렇게 시간이 제각각
이더니 오늘 따라 일찍 착륙했다는 생각에
괜히 비행기 기장에게 화가 났다.
허탈한 생각으로 플랜카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다른 장소로 가려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뭔가 단단한 물체에 부딪힘과 동시에
등이 뜨거웠다. 그녀의 입에서는 비명이 손은 착 달라붙어 뜨거운 옷을 들어내느라 난리였
다.
“앗 뜨거워!”
고개를 홱 돌려보니 그 물체였던 건장한 남자 또한 새하얀 니트에 갈색으로 얼룩이 진 앞섬
을 들어 올리느라 난리였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그녀와 눈이 마주쳤지만 화가 난 기색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미안한 생각보다 정말 멋지다는 단어밖에 머리 속에 떠오르지가 않았다. 너무나 큰
키였다. 그녀보다 20cm는 클 것 같았다.
그리고 적당히 그을린 피부와 날카롭지만 너무나 검고 깊은 눈망울이 그녀의 마음을 설레이
게 했다.
갑작스런 그런 생각을 날려 버리듯 그녀가 더듬거리며 사과에 나섰다.
“어머, 정말 죄송해요. 뒤에 누가 있다고는 생각도 못하고…세탁비를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옷값을 배상해 드릴께요.”
옷은 딱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가격으로 보였다. 그녀가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려 하는데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순간의
느낌이란 전기가 통한 느낌이랄까, 절대 정전기는 아니었다.
“네? 왜…”
그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세탁비는 됐고 커피나 한잔 사주시죠?”
“네?”
“마시려던 커피를 쏟았으니 새로 사주셔야 맞지 않겠소?”
이 남자의 꿍꿍이는 무엇일까, 나한테 설마 관심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가 환하게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을 하자 입가에 움푹 패인 보조개가 보였다. 그냥 봐도
잘 생겼는데 보조개까지 보이며 웃자 보희의
마음이 녹아 내릴 것 같았다.
그녀는 콧등 위에 있는 애꿎은 안경을 고쳐 썼다.
“그게 말이죠. 옷을 봐서는 커피 한잔으론 안 될 것 같..”
또 그가 말을 자른다. 생긴 거와 달리 너무 없이 말이다.
“그럼 커피도 하고 저녁 식사도 함께 하겠습니까?”
너무 어이가 없는 사람이다. 아마도 여자를 꼬시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남자 같았다.
“이것 보세요. 제 말을 끝까지 들어 주실래요? 저는 옷이 비싸 보이니까 커피 한잔으론 안
되고 옷을 변상해 드리겠다는 소린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중요한 분을 배웅하러 왔기 때문에 그쪽하고 커피 한잔
할 시간이 없어요.”
그녀의 빠른 말 공격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오?”
“저한테는 아주 중요하죠. 저의 회장님 자제분이신데 지…제가 그쪽한테 이런 말까지 할 필
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알았습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식사나 합시다.”
그는 그녀가 돈을 내밀기도 전에 뒤돌아서 가 버렸다.
“이봐요? 이봐..”
소리쳐 불렀지만 그는 뒤도 안 돌아봤다.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설레이는 사
람을 만난 적이 없었던 그녀는 그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 일을 생각하고 그의 얼굴과 외모를 생각
하기에는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보희는 회장 아들인 황태석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그녀가 만든 플랜카드를 들어 보았다.
‘혜성 그룹 황태석’이란 문구만 달랑 써
놓았다. 그녀는 그 플랜카드를 들고 공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창피함도 무릅쓰고 공항
내에 있는 상점이란 상점은 다 뒤졌지만 40분
동안 별 특별한 소득이 하나도 없었다. 옷은 서늘한 냉방 때문에 마르지도 않고 얼룩이 진
채로 돌아다녀야 했고 다리는 하이힐 때문에
아프기만 했다. 기다리다 그냥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결국 포기하고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박부장님, 최보희입니다. 차 접속사고 때문에 좀 늦었는데 그 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죠?”
그녀는 혼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부장은 더없이 일 처리에 깔끔한 사람이었다. 하지
만 그녀는 그의 화보다 더한 소리를 들었다.
“최대리 됐으니까 그만 들어오게. 아까 김기사한테 전화가 왔는데 도련님을 모시고 오는
길이라고 하더군. 근데 최대리는 택시 타고 들어
와야겠어. 도련님이 바쁜 일이 있다면서 최대리를 기다릴 시간 없다고 가자고 했다더군. 영
수증 가지고 들어오면 회사에서 처리해 줄
테니까 빨리 들어오게.”
뚝… 일하면서 이보다 더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그녀는 들어본 바가 없었다. 매정한 인간
같으니라고.
돈 있는 놈들이 예의는 공부하면서 버려 버렸나 그런 무경우가 어딨담. 차라리 아까 그 남
자하고 차나 마실걸 하고 생각했다.
씩씩대던 그녀는 플랜카드를 한 번보고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찢어서 쳐 박았다. 그리고 택
시 정류장으로 가서 모범 택시를 잡아 탔다.
다리품을 팔은 만큼 그녀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안심하고 편안한 모범 택시를 타고 회
사로 돌아갔다.
태석은 5년 만에 서울에 돌아 왔다. 그동안은 캘리포니아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따느라
올 시간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이 집
식구들하고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에 발도 들여놓기 싫은 이유가 더 컸지만 말이다.
너무나 가식적인 황씨 인간들이었다. 필요에
의해 웃음을 판다.
그를 배웅 나온 그 아가씨가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몸에 착 달라붙는 짧은 흰색 원피
스에 웨이브 진 긴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뒷모습만 보았지만 그녀의 얼굴이 궁금해서 가까이 갈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작은 플랜카드에 눈이 먼저 갔다.
황회장이 보낸 사람이란 생각에 실망을 하고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녀가 그에게 부딪쳐서 막
뽑은 커피가 쏟아졌다. 물론 화를 낼
심사였지만 뭐랄까 그녀의 얼굴을 보고 금방 화가 사라졌다. 안경을 쓴 모습은 딱딱하게만
보였지만 놀라서 커다랗게 변한 검은 눈동자와
풍성한 그녀의 입술이 더 없이 섹시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언제부터 저렇게 깐깐해 보이는 스타일을 좋아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그냥 김기사를 보자 마자
집으로 와 버렸다. 다음에 그녀를 만나게 되면 왠지 즐거운 일 하나를 만들어 놓아서 그런
지 재밌었다. 평소 장난을 좋아하지 않던
그였지만 그녀는 그에게 흥미를 자극해 주었다.
그녀 생각을 지우고 앞으로 일을 생각하니 벌써 황회장의 집에 당도했다. 그 집을 보니 좋
았던 그의 기분이 나빠졌다.
그가 10살 때 이 집으로 호적을 옮긴 그때부터 그는 다시 그의 성을 바꿀 수 있는 날을 기
다리며 그들의 가식적인 호의를 참아야만
했다. 그리고 회사를 되찾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말이다.
그는 으리으리한 대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 후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일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기계음을 타고 들렸다.
“태석입니다.”
곧 문이 열렸다. 정원을 가로질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호화로운 집안에 없는 것 없는 고가품들의 가구들과 명화들 그 사이에 앉아 있는 이 집의
안주인 황용 주의 아내가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곱게 한복을 입고 앉아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싸늘
한 눈빛과 입가에 맴도는 미소가 그를
맞이했다.
“어머, 태석이 왔구나. 어서 이리 앉으렴. 아줌마. 아줌마?”
“네.”
“태석이 차 한잔 갖다 줘요.”
아주머니께 차를 시킨 후 그녀가 물었다.
“오랫동안 얼굴도 안 비치고 정말 섭섭하구나. 그래, 이제 완전히 들어 온 거라고?”
“네.”
그가 짧고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그녀의 얼굴이 희미하게 떨리는 듯 했다.
“그래 아버지는 뵙니?”
“아니요. 옷에 얼룩도 지고 피곤해서 그냥 여기로 왔습니다.”
“아버님이 서운하시겠다. 회사에서 바로 보시려고 김기사까지 달려 보냈는데 말이다. 차 한
잔하고 올라가서 쉬려무나. 방은 잘 치워
뒀어”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아닙니다. 여기 갖다 둔 짐을 챙겨야죠. 그래서 왔습니다.”
그녀의 우아한 한 쪽 눈썹이 활을 그리듯 올라갔다.
“무슨 소리니?”
“친구한테 회사 근처에 아파트 하나 얻어 두라고 했어요. 오늘 바로 들어 갈 수 있게 꾸며
놓았다니까 여기 맡겨 둔 짐이나 대강
정리하고 있다가 이삿짐 센터에서 가지러 오면 바로 옮겨 실을 수 있게 하려고요.”
그녀의 표정에 깜짝 놀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니? 너 온다고 방도 새로 꾸며 놓았는데. 아버지가 집에서 살 거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가 집에서 지내야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황회장이 지시한 모
양이었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했다. 그는 그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죄송하지만 전 그게 편합니다. 그게 사모님하고 회장님하고 신경 덜 쓰게 하는 일일텐요.
전에 쓰던 방에 제 짐이 다 있겠군요. 그럼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정부를 찾아 짐 챙길 상자를 부탁하고 올라갔다.
그가 계단 올라가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녀는 전화를 걸었다. 태석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
었다. 그가 계획에 차질을 일으켰다고 말할
것이다. 더 큰 신경을 쓸 일이 생겼다.
태석은 방안에 들어가서 앨범부터 챙겨 들었다. 그의 가족이 함께 찍었었던 소중한 추억이
었다. 앨범은 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유일한 낙은 앨범을 보는 일이었고 복수의
칼날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 원동력이었다.
사고로 위장하여 황회장은 그의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고 태석만이 절대 사고가 아니었
음을 알았다. 어렸기 때문에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이 그에게 더 없는 한으로 남았다. 이젠 황회장에게 죄의 대가를 물
게 할 생각이었다.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오빠, 언제 왔어?”
막내 민지였다. 그녀는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어렸을 때는 그가 친오빠인 줄 알았었지만 그
녀도 황씨 가문의 한 명이라서 그런지 눈치가
빨랐다. 부모가 몰래 하는 대화를 엿듣고 나서 그가 친오빠가 아닌 것을 알고 목을 놓아 울
던 것이 생각났다. 그녀는 그에게 유일하게
따뜻하게 대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녀 때문에 황회장에게 복수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하질
않았다.
“오빠 너무 섭섭해. 그동안 집에도 오지 않고 캘리포니아에 기껏 갔더니 여행이나 가고 연
락도 안하고 너무했어.”
그녀가 새침하게 그의 팔에 안기며 말했다.
“미안해. 그동안 정신 없이 바빠서 말이야. 우리 민지 이제 여자 다됐구나.”
그의 팔에 안긴 민지를 떼어 내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철부지 어린 동생이 이젠 대학생
이라고 화장부터 옷까지 상당히 세련되어졌다.
황회장의 딸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워 졌다.
“이거 왜 이러셔. 이젠 남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쫓아다닌다고. 옛날의 황민지가 아니
지. 그건 그렇고 오빠 이제 집에서 살
거라면서?”
순간 그의 입가에 그나마 서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민지가 눈치를 보더니 덧붙였다.
“역시 아빠만의 생각이셨군. 오빠가 여기서 살 리가 없지. 괜히 헛 꿈만 꿨네. 좋다 말았잖
아.”
“미안하다. 밖에서 혼자 사는 게 편하고 회사에서 왔다갔다 하기도 피곤해서.”
민지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오빠. 아빠는 미워해도 난 미워하면 안 돼. 그리고 오빠 집에 자주 놀러갈거야.”
“집에는 자주 오지마. 어차피 집에 잘 있지도 않고 밤이나 늦게 들어갈텐데. 전화하면 저녁
은 사줄게.”
서운해하는 표정이 역력한 민지였지만 애써 내색하려 하지 않았다.
“알았어. 그 대신 비싼 것만 사 달라고 할거야. 오빠 내가 짐정리하는 거 도와 줄게.”
민지는 서운한 표정을 보이는 게 싫은지 얼른 몸을 돌려 옷장에서 옷을 꺼내 정리했다. 태
석은 민지의 마음을 모르진 않지만 크게 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남자로 보는 것도 애써 모른 척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곧
일이 크게 터질텐데 그녀가 속상하게 할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짐정리를 마치고 이삿짐 센터에서 그가 지시하는 물건만 들고 갈 수 있게 지시를 했다. 그
리고 황회장 부인에게 대강 목례만 하고
민지에게는 손을 잡아 주고 그의 새 아파트로 향했다.
보희는 사내 도서관에서 박부장이 지시한 자료를 찾으러 왔다가 볼 일을 마치고 엘리베이터
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제도 밤늦게까지 동생과
놀아 주다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몹시 피곤했다.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미운 7살이라서
그런지 말썽도 많이 일으켰다. 늦게 까지
일하는 보희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면 잠 든 척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들어오면 어김없
이 깨어났다. 새벽에 동생 별이랑 놀아 주는
것도 이제는 힘에 부쳐서 제대로 놀아 주지 못해 항상 미안하기만 했다.
기다리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줄도 모르고 멍청히 다른 생각을 하다가 그녀가 문이 열
리는데도 타지 않자 한 남자가 문을 닫지 않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타긴 탔지만 결국 그녀가 서둘러 타다가 발이 걸려 엘리베이터 안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카
피한 종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넘어진 충격으로
안경이 벗겨졌다. 무엇보다도 창피해서 얼굴이 불같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단 한 사
람만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고 자신을 위로했다.
“괜찮소?”
어딘지 들어본 저음의 목소리, 웃음을 참는 듯 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 네.”
그녀가 일어나 앉아 흩어진 서류들을 주워 모으는 것을 그 남자가 도와 주었다. 그녀에게
서류를 건네는 손가락이 그녀의 손끝에 닿아
그녀가 깜짝 놀랐다.
“고맙습..”
감사하다고 말하려고 고개를 들던 그녀. 할 말을 잃었다.
“당신.. 그때.. 그…”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또 만났군요. 이제 식사를 해도 되겠군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멀뚱히 그를 쳐다보았다.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군요. 그때 다시 만나면 식사하기로 했잖소.”
너무나 당연스레 말하는 그 때문에 보희는 자신이 진짜 약속을 한 줄로 착각할 뻔했다.
“그건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말하고 사라진 걸로 아는데요. 서류 고마워요.”
그가 준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가 준 안경도.
안경을 쓰는 그녀를 보며 그가 말했다.
“안경을 안 쓰는 쪽이 훨씬 인상이 부드럽고 예쁜데 왜 굳이 쓰는 거요?”
“눈이 나빠서요.”
그녀가 층 버튼을 누르려는데 이미 40층에 버튼에 눌러져 있었다.
“요즘은 콘택트렌즈도 있는데 안경은 불편하잖소. 키스하기도 힘들고.”
그가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입술을 훑더니 그녀의 몸매까지 훑고 지나갔다.
“키스는 하나도 안 불편합니다. 좀 무례하시군요.”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하려고 했다. 하지만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남자 앞에서 이렇게 당
황하기는 처음이었다.
“무례했다면 사과하죠.”
태석은 그녀의 사원증을 보고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최보희. 그의 마음을 묘하게 흥분시키는
여자였다. 이처럼 가슴에 바람을 일으키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눈은 까만 색이었다. 안경테도 까만 색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왠지 어울리지가 않았다. 벗겨서 큰 눈망울을
바라보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풍성한 입술도 갖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에게 딱 맞는 키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작은 키도 아니었다.
그하고 20cm정도 차이가 났으니까 말이다.
“회장실에는 무슨 볼 일이시죠?”
깔끔하게 검은 정장에 은회색 넥타이를 차려 입은 그를 보며 그녀가 물었다.
“볼 일이 있어서 말이오. 그쪽은 무슨 일이오?”
“저야.. 보좌관입니다.”
몰랐다는 듯 그가 눈을 빛냈다.
“그렇군요.”
그녀가 더 물어 볼 수도 없이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가 그녀에게 먼저
내리라며 한 쪽으로 물러섰다. 그녀도
고개를 숙이며 먼저 내려섰다.
문은 양쪽으로 나 있었다. 한쪽 문은 회장실 한쪽은 중역들만 쓸 수 있는 회의실이었다. 그
녀의 뒤를 따라 그가 따라 왔다. 그녀가 문
앞에서 멈췄다.
“정말 여기에 볼 일이 있으신 가요?”
그녀가 의심쩍어서 물어 보았다. 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를 제치고 문을 열
고 들어갔다.
“이봐요.”
그녀가 그의 팔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박부장님이 그녀를 보고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둘째 도련님 오셨습니까?”
반갑게 맞이하는 박부장님과 함께 일어나는 김소정과장님을 보고 보희는 경악을 금치 못했
다.
보희는 잡았던 팔을 놓고 얼른 사과를 했다. 찾아 헤매던 사람이 이 인간이란 사실이 믿겨
지진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회장님의 자제 분이신 줄 모르고 죄송합니다.”
보희가 허리를 굽히며 사과했다.
“괜찮소. 모르고 한 일인데.”
그는 황회장 비서이기 전에 아버지의 오랜 비서였던 그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아저씨, 안녕하셨어요? 건강엔 별 일 없으시죠?”
“아직까진 별 일이 없습니다. 회사도 잘 돌아가고 말이죠. 최대리의 일은 용서하세요. 일년
밖에 일하지 않아서 도련님을 모르고 한
일이니까.”
“물론이죠. 회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가 회장의 얘기를 꺼내자 그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가 인터폰으로 태석이 온 사실을 알렸다.
“네, 알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돌려 그를 안내했다.
태석이 안으로 들어가자 박부장님이 그녀를 보았다.
“최대리 가서 차 좀 안으로 들이게. 앞으론 얼굴 잊지 말고.”
보희는 너무 기가 찼다. 그때 자신을 공항에 버리고 간 예의 없는 황회장의 아들이 그라는
사실에 화가 너무 났다. 그리고 그때 일을
잠시 잊고 죽을 죄를 지은 것처럼 굽신거리며 사과한 일도 너무 화가 났다. 그는 아마 그때
내가 들고 있던 플랜카드도 보았을 것이고
커피를 엎질렀다고 복수심으로 자신을 버리고 갔던 것일까 하고 생각하니 머리에 열이 났
다.
보희는 차를 끓여서 쟁반에 받쳐들었다. 그리고 회장실 문으로 가서 노크를 한 후에 들어갔
다.
그녀가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가는 순간까지 그의 시선이 자신한테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확신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회장님의 시선도 느껴졌다.
보희가 나가고 태석은 얘기를 계속했다.
“제 자리는 마련해 두셨죠?”
태석이 회사에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 두기로 한 회장의 예전 말을 끄집어냈다.
“물론이다.”
“전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배울 생각은 없습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을 했다.
“내 생각도 그렇구나. 너만한 인재도 구하기 힘들고 애써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
각한다. 경영 이사 자리를 준비해 두었다.
일은 언제부터 하겠니?”
“3일뒤 월요일부터 하겠습니다. 중역회의는 언제 있습니까?”
그가 묻자 황회장이 대답했다.
“다음주 수요일에 있을 예정이다. 그때 너의 존재도 소개시키고 싶구나.”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기회를 보고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그리고 제 사무실에 기용할 비서 말씀인데요.”
그가 심각하게 말을 하자 황회장이 나섰다.
“걱정 말아라. 좋은 여비서로 구해 놓았다. 경력도 되고 일도 확실하게 잘하고 말이다.”
“아니요. 아까 들어왔던 최보희비서로 하고 싶습니다.”
황회장은 약간 동요하는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말이냐? 최비서는 일년밖에 일하지 않아서 너한테는 별로 도움도 안 될 테고
능력이 좋아서 내가 비서로 데리고 있으면서
박부장이 잘 키우고 있는데 말이다. 그냥 내가 구해 놓은 비서로 하지.”
“아니요. 저 비서가 괜찮을 것 같군요. 박부장님이 가르치셨으면 일년이 아니라 반년만 일
했어도 확실한 보증수표겠죠.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데로 해 주시죠?”
태석의 태도가 너무나 분명해서 황회장은 어쩔 수가 없었다. 황회장은 태석이 어떤 일을 하
고 다니는지 알 수 있게 그가 심어 놓은
비서를 통해 알아내려 했는데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의 주식만 아니었다면 그가 태석에
게 이렇게까지 얽매일 필요는 없었다. 그가 더
반대하면 태석에게 그의 의도만 들킬 것 같아서 그가 하자는 대로 하였다.
“뭐 네가 좋다면야 어쩔 수 없지. 너랑 같이 일할 비서 일은 없었던 걸로 하기로 하자. 그
건 그렇고 나랑 점심이나 먹기로 하자.
집에 오자마자 나가서 같이 얘기할 시간도 제대로 없었잖느냐?”
그가 점심을 권했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닙니다. 선약이 있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회장도 따라 일어섰다. 너무나 작은 황회장은 그의 가슴팍에나
닿았다. 서로 다른 외모에서부터 서로가 친부
자지간이 아님은 누가 보아도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태석이 나간 후에 보희는 회장실로 불려 들어갔다. 혹시 태석이 자신의 실수를 치사하게 회
장님께 이른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지만 그녀는
또 깜짝 놀랄 사실을 알았다.
“최대리.”
담배를 손에 들고 있는 황회장의 심각한 목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네?”
“미안하지만 회장실 보좌일을 그만 둬야겠네.”
그녀는 커피 한잔 엎지른 대가 치고 너무 크다는 생각에 억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커피 한잔 엎질렀다고 절 해고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황회장은 몰랐다.
“최대리가 무슨 말하는지는 모르겠고 월요일부터는 황태석이사의 비서로 일했야겠네. 내
둘째 아들인데 월요일부터 정상 출근 할걸세.”
그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황태석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황회장은 그의 둘째 아들이란 말을
하면서 못마땅한 기색이 너무나 완연한 모습이었다. 부자 사이가 안 좋은가 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자네한테 부탁이 있네. 황태석이사의 스케줄 중에서 이상한 점이 있으면 나한테
직접 보고하게. 잊지말고 알았나?”
“왜 그런 일을 지시하시는 겁니까? 회장님?”
그녀의 질문에 무슨 말이 많냐 면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라고 역정을 내었다.
이상한 부탁이었다. 황회장은 황용민상무의 스케줄도 관여를 하지 않았었다. 근데 황태석에
게만은 예외 인가보다. 뭔가 사고를 잘 치는
성격일 거라고 보희는 생각했다. 보희는 황회장에게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하고 나왔다.
박부장과 김소정과장은 그녀의 발령을 듣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들은 그 날 점심때 보
희의 송별회를 미리 해주었다. 일년간 열심히
일한 동료이자 제자를 잃은 슬픔이 크다고 그들은 그녀를 위로했다.
보희는 다음날 회사 일이 끝나고 잠시 집에 들렸다. 자신보다 3살 어린 남동생 세민이가 막
내인 여동생 별이하고 놀아 주고 있었다.
“어제 피곤했지, 세민아?”
그녀가 안경을 벗고 검은색 콘택트렌즈를 빼며 물었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술마시러 오는 사람이 많더라. 그 비싼 술들을 어떻게 먹나 몰라.”
세민이는 보희가 소개시켜 준 보스라는 술집에서 웨이터 일을 하고 있었다. 군대 갔다가 2
달 전부터 일년만 일하고 2년 남은 학교를
자기 돈으로 다니겠다는 억지에 그녀는 두손을 들고 그녀가 소개시켜 준 곳에서 일하고 있
었던 것이다. 보희가 20살 때부터 7년을
힘들게 일하는 것이 도저히 미안해서 그렇다는 이유였다.
사실 보희는 자신이 일을 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라 희생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고 동생들 뒷바리지에만 신경을
썼다. 어머니가 보희의 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7년동안 결혼을 세 번을 했고 그 결과는
아주 좋지 않아 결국 보희는 집안의 생계를
이어야만 했다. 어머니와 결혼 한 남자들은 하나같이 사고로 죽었다. 별이의 아버지는 사업
이 부도가 나자 자살을 했고 어머니는 별이를
40이라는 늦은 나이에 갖으셨지만 양부의 자살로 큰 충격을 받아서 인지 그 소식을 접한 날
예정일보다 한 달 빨리 별이를 낳았고
정신이 나가 버렸다. 그래서 자기 자식도 기억을 잘 못했다. 심장까지 나쁜 엄마는 결국 정
신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고 그녀는 돈이
없었다.
집안에 돈이라고는 보희의 친아버지가 그녀에게 남겨 둔 시골에 있는 땅이 전부였다. 그 땅
을 팔아 별이와 어머니의 병원비를 일단 하고
보증금 딸린 월세집을 얻어서 3년을 살았다. 그래서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고 선배가 소개시켜 준 카지노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처음 그 일을 하기 전에는 하루 먹기에도 힘에 부쳤지만 손재주와 밝은 성격으
로 팁을 상당히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월급도
괜찮았고 팁도 괜찮았기 때문에 보희는 복학 후에도 그 일을 병행했다. 다행히 등록금은
어렵게 탄 장학금으로 대신 할 수 있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생활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지노에서 일을 계속 해야 했다.
그러다가 지금 일하는 곳에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하여 그녀는 자리를 옮기게 되었
다. 카지노에서 3일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을 지금 일하는 곳에서는 하루에 벌 수도 있었고 그 이상을 벌 수도 있었다.
대신 밤에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불편했고 이곳에서는 도박이 불법이어서 잘못하면 그녀에게
도 피해가 올 수 있어서 늘 불안하긴 했다.
하지만 이 곳에서의 수입으로 지금은 방 세 칸인 전세로 옮길 수도 있었고 어머니를 위험한
정신병원이 아닌 일반 요양소로 옮길 수도
있었다. 세민이의 등록금과 생활비 또 별이를 돌봐 줄 수 있는 가정부도 구할 수 있어 다행
스런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곳에서 구해
준 가정부는 불법 체류 중인 여자애였고 그녀가 데리고 있기로 했다. 그 가정부도 크게 고
단하지 않고 숙식이 제공되어서 일도 열심히 해
주었고 중국에 있는 어린 동생들을 많이 돌봤었기 때문에 별이도 잘 돌봐 주어서 그녀는 학
교와 일터를 마음놓고 다닐 수 있었다.
“누나 일을 좀 줄이지 그래?”
세민이 걱정이 되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안 돼. 내가 일을 줄이면 엄마 요양소 비용은 어떡하니? 간병인 비용은? 별이도 계속 크
는데 별 수 있어? 어디서 돈이 떨어지면
모를까? 자꾸 그런 말해 봐야 나한테 씨도 안 먹혀.”
보희는 콘택트 렌즈 때문에 뻑뻑해진 눈을 지그시 눌렀다 떼었다. 한국사람은 검은 색이나
갈색눈을 가졌지만 그녀는 유전자가 이상한지
눈이 연두색과 초록색이 교묘하게 섞인 눈이었다. 병원에서는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하
니 별 일은 없지만 어려서부터 많은 놀림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녀를 튀기라고 놀리는 아이들이 많았고 어른들은 신기하게 바라보았었다.
그래서 회사에도 렌즈에다가 도수 없는 안경을
쓰고 일했다. 물론 안경은 쓸 필요는 없지만 그녀가 일하는 곳에서 가끔 회사 중역들이 오
곤 하기 때문에 회사에 들키지 않기 위한 위장
전술이었다.
“누나도 남자도 만나고 결혼도 해야지.”
“남자는 너있고 결혼은 하면 애 낳는 건데 별이 있으니 됐고 뭐가 걱정이니.”
너무나 황당한 대답이었고 늘 듣는 말이지만 세민이로서는 미안했다.
“누나가 우리 때문에 너무 고생하니까.. 여자로서의 삶이란 것이 있잖아. 누나가 가장 노릇
하는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
“쓸데없는 걱정말고 빨리 졸업하는 길이 날 돕는 거야. 네가 하도 졸라서 일하게 해주지만
네가 공부 열심히 해서 검사든 변호사든
판사든 뭐든 돼서 날 도와 주면 되잖아. 몇 년만 더 참자. 그리고 엄마한테도 자주 가 봐.
기억 안 하려는 분 자꾸 얼굴 보여서
기억나게 해야지. 요즘은 심장도 더 나빠 지셨다는 구나. 누나는 일이 바빠서 잘 못 가니까
너라도 자주가 봐.”
별이가 어느새 그녀 곁에 다가와 앉았다.
“엄마, 별이도 엄마가 일 안 했으면 좋겠어. 별이랑 많이 안 놀아 주고.”
별이는 그녀를 엄마로 부른다. 낳자 마자 엄마가 병원에 입원되어서 그녀와 세민이가 엄마
아빠가 되어 주었다.
“미안해, 별이야. 어쩔 수가 없구나. 근데 별이 유치원에서 남자 친구 생겼다며? 어떻게 엄
마를 두고 그럴 수 있니.”
보희가 우는 척을 하자 별이가 우물우물 거렸다.
“엄마, 그래서 속상해? 그럼 별이 남자 친구 버릴래. 엄마 그러니까 울지마.”
별이의 귀여운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좋다는 남자를 차다니. 버린다고 하면 안 돼. 찬다고 해야지 알았어?”
“알았어, 엄마. 아빠가 별이 머리 따 줬어. 예쁘지?”
아빠가 된 세민이가 따 준 머리를 자랑하며 돌아선다. 양 갈래로 따 놓은 머리는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아빠가 머리 진짜 못 딴다. 엄마가 다시 해줄게. 이리 와 봐.”
“누나는 내가 뭘 어쨌다고 다시 따. 그냥 둬.”
세민이가 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별이의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애 다쳐. 내려 놔. 빨리.”
그들이 장난치고 웃는 사이에 가정부이지만 지금은 식구나 다름없는 츠량이 들어왔다.
“보희언니, 점심식사 차려 놨어요.”
억양만 빼면 츠량은 이제 한국말을 아주 잘한다. 중국에서 건너 온 츠량은 처음 그녀가 데
려 왔을 때 한국말을 하나도 못했다. 17살
어린 나이에 불법으로 한국에 건너왔고 다행히 보희를 처음 만났다. 한국 사람들 치고 불법
체류자에게 해코지 안하고 잘 데리고 있는
사람들이 드물었고 츠량은 너무나 연약했다. 지금은 잘 먹고 해서 그런지 이제 숙녀티가 너
무 많이 났고 중국 여자들이 이쁘다는 말을
츠량을 보고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보희와 세민이 열심히 가르쳐서 이제는 읽고 쓰
고 말하기도 무척 잘했다.
“세민아, 별이야 밥 먹자.”
보희가 세민과 별이를 부르고 밖으로 나가는 길에 세민이 츠량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왜그래?”
보희가 묻자 세민이 당황하면서 그냥 나갔다. 츠량을 쳐다보자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것도 모르고 보희가 츠량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츠량, 감기 기운 있는 거 아냐? 5월이나 됐는데 웬 감기지? 약 꼭 챙겨 먹어. 아니면 언니
랑 언제 병원이라도 가자.”
“네.”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사를 하다가 세민이를 불렀다.
“세민아, 있다가 같이 일 나가자. 나 조금만 잘 테니까 1시간 전에 깨워, 알았지?”
세민이 고개만 끄덕이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보희는 새로 부임하게 된 황태석 이사가 먼저 출근하기 전에 출근할 작정으로 8시10분쯤에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실 안에
들어가기 전에 원두커피를 뽑아서 한잔 마신 후에 이사의 책상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막 커
피를 마시려고 잔으로 입을 갖다 대다가 이사실
문이 벌컥 열려서 입천장을 데었다.
“앗, 뜨거워.”
그녀는 데인 입을 어쩔 몰라 하며 손부채질을 해 보았다. 쓰라리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
는 것 같았다. 보희가 야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일찍 나와서 사람을 고생시키는 건지. 무슨 커피하고 저 남자하고 난 뭔가
악연이 있는 걸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렇게 일찍 출근했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아서 더 놀랐다. 황회장은 조찬 약
속이나 회의가 있지 않은 이상 항상 9시
정각에 출근을 했다.
“최보희씨, 일찍 나왔군. 나도 커피 한잔 부탁하겠소.”
그러고는 쌩하니 들어가 버렸다.
보희는 신경질 적으로 커피 잔을 찾아 원두커피를 붓고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미 서로의
이름을 알아서인지 황태석은 그녀에게
통성명이라든가 의례적인 인사 조차 건네지 않았다.
“일찍 나오셨습니다. 이사님.”
예의적인 말을 했다. 그도 그녀의 대꾸에 답했다.
“보희씨도 일찍 나왔군요. 원래 이렇게 빨리 나옵니까?”
“아닙니다. 오늘 이사님 첫 부임날이라 일찍 나왔습니다. 저는 항상 9시 10분 전에 출근합
니다.”
“항상?”
그의 짙은 눈썹이 올라갔다.
“물론 가끔은 더 일찍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나요?”
“아니오. 그냥 물어 봤소. 강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보희씨도 커피 들고 와서 여
기서 마시도록 해요. 할 말도 있으니까.”
그가 그녀에게 자리를 권였다.
“아닙니다. 커피를 마실 수가 없어서요.”
그녀가 저도 모르게 새침하게 말한 것에 놀랐다. 하지만 수습하면 자신이 더 우스울 것 같
았다.
“아깐 마시고 있었잖소?”
“이사님이 문을 여시는 것에 놀라서 입천장을 데었습니다.”
그녀가 입을 오물거리며 대답했다. 그의 시선이 입술에서 떨어지질 않아서 민망했다. 그가
그녀의 말에 미소를 머금었다.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잘…”
“아, 일단 앉아요. 학생이 꼭 선생님한테 야단 맞는 것 같아 불편하군.”
그녀가 자리를 차지하고 맞은 편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예쁜 다리가 무릎 밑까지 보이는
옷 때문에 그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같이
내려왔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일단 다음부터는 9시에 와도 좋소. 근데 야근이 많아 질 겁니다. 내가 이 회사의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기
때문에 앞으로 일이 많을 겁니다. 그건 각오하시오. 물론 수당이야 지급되겠지만 말이오. 그
리고 내 스케쥴에 대해 누가 묻거든 절대
알리지 마시오.”
그의 마지막 말에 보희는 깜짝 놀랐다. 그가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물었다.
“왜 그러시오? 황회장님이 지시한 일이 있나 본데.. 월급이야 그 사람이 주겠지만 일단 내
밑에 있는 이상 내 지시에 따르시오. 그가
당신의 인사 발령에까지 신경 쓸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시오. 혹시 돈 받았소? 받았다면 내
가 주지.”
그는 말하면서 그녀의 기분이란 것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고 그녀의 표정 변화도 신
경 쓰지 않았을 뿐더러 물론 그녀말고도 그는
다른 사람의 기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인간으로 만 보였다. 그녀의 추측이 틀릴 리가 없
었다.
잠시 동안이나마 그가 멋있다고 한 말을 전부 그녀 기억 속에서 버려 버릴 것이다. 앞날이
캄캄했다.
“절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회장님께서는 전혀 그런 일을 지시하
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변에서
신경을 많이 쓰신다고 생각하니까 말씀인데요, 그렇게 불안하시면 사람시켜서 도청 장치는
없는지 조사부터 하시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하자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앉혔다. 보희는 그 순간만
큼 용감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표정은
뭔가 잡아먹을 듯이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가 심호흡을 하듯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얼
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시작했다.
“내가 말이 끝났다고 하기 전에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마시오. 알았소. 그리고… 기분 상
하게 했다면 미안하오. 당신에 대해 오해
한다기 보다 황회장이 의심스러웠던 거니까 말이오. 집안 일 때문에 괜히 당신이 화가 나게
했군. 사과하겠소.”
그의 사과에 미심쩍은 표정으로 받아 들였다.
“그.. 그럼 사과를 받겠습니다. 나가 봐도 되겠습니까, 이제?”
여전히 안면 근육이 놀라서 풀리지 않았다.
“고맙소. 이따가 점심식사나 함께 합시다. 같이 일한 기념으로 말이오. 그리고 올 상반기
회사 재무 재표하고 매달의 매출 현황표 좀
정리해서 주시겠소?”
그가 내린 첫 번째 임무였다.
“네, 알겠습니다.”
보희는 그와의 첫 대면 아닌 대면으로 기분이 상했지만 그에게 재무 재표를 가져다 준 후
매출 현황에 대한 정리와 그 밖의 참고
자료들을 찾아서 정리하느라 점심시간까지 맞추느라 힘들었다. 점심이야 안 먹어도 그만 먹
어도 그만이었지만 말이다.
몇 시간이 지난 후 그가 점심 식사를 하자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그녀가 자료를 가
져다 준 후 한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었다.
“잠시만요. 자료 좀 저장하고요.”
그녀가 마우스를 움직이면서 잠시 꾸물거릴 동안 그가 문에 기대어서 팔짱을 낀 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문가에 기대어 서서 그녀 하는 일을
바라 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의 눈에서
관심의 눈길이 철철 넘쳐서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그는 어깨만 으쓱거릴 뿐 문을 열고 그녀가 나서길 기다리고 있었다.
태연한 척 하며 핸드백을 들고 문을 나섰다. 그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눌렀다. 그
시간이 왜 그렇게 긴 건지 어색하기만
했다. 온몸의 촉각들이 곤두선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층수가 내려가는 숫자만 주시했다.
그녀는 그게 더 불편했지만 말이다.
그는 가까이 있는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회를 무척 좋아했다.
“뭘로 먹겠소? 회를 싫어하거나 하진 않겠죠?”
좌상을 하고 둘이 마주 앉아 주문을 고르는데 그가 물었다. 그들 중간에는 웨이트레스가 앉
아서 주문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이죠. 제가 먹고 싶은 거 시켜도 되나요?”
“물론이오. 여비서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사는 거니까. 알았소. 앞으로 잘 해보자는 의미에
서 사는 거요.”
그녀는 그를 보던 눈을 메뉴로 돌렸다.
“제철이 아닌데도 대구회가 있네요.”
“네, 손님. 그런데 가격이 좀 비싸지만 회 드시는 분들은 생 대구회만큼 맛있는 회가 없다
고 하십니다.”
여종업원의 친절한 설명으로 그녀는 대구회를 주문했다. 물론 그에게는 좋냐는 말도 안 물
어 보았다. 그녀에게 여태까지 골탕 먹인
값치고는 쌌지만 이 정도로 하기로 했다.
“그때 공항에서 데이지는 않았소?”
그는 그녀에게 그때의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네, 괜찮습니다. 그때 급한 볼 일 때문에 가셨다고 하시더군요. 서로가 얼굴을 알았다면
그런 불편함은 없었을텐데 말입니다.”
그녀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아, 그일… 당신이 날 마중 나온 거 알고 있었소.”
“뭐… 뭐라고요? 그럼 왜…”
그의 황당함 정말 끝이 없는 듯 했다.
“당신이 나랑 차 한잔하기 싫다고 하기에 그랬소.”
“그건 당… 아니 이사님을 찾아야 해서라고 말씀 드렸을 텐데요.”
“글쎄, 그땐 그냥 당신이 나중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소. 미안하군. 이젠 당신이 어
떤 반응이 나올지 알았소.”
“어쩜 그런 말씀을 그렇게 쉽게 하시죠? 전 1시간이나 찾아 다녔는데. 그리고 그렇게 무표
정한 얼굴로 사과하지 마세요.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어 보이니까요”
“정말 미안하군. 이렇게 웃으면서 사과하면 되겠소?”
그의 얼굴이 활짝 핀 듯 크게 웃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물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애인은 있소?”
“그런 사생활 질문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없군.”
그녀는 더 말을 섞어 봐야 그한테 즐거움만 줄 것 같아 열심히 대꾸하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그녀는 어떤 일에서도 잘 흥분을 하지
않았는데 그만은 그녀의 인내심에 바닥을 드러내게 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물수건을 펴서 그녀에게 건네 주고 그도 손을 닦기만 하고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보희는 9시가 돼서 퇴근할 수 있었다. 점심과 저녁은 샌드위치를 배달해서 일하면서 먹은
게 다였다. 벌써 일주일 째 식사다운 식사는
할 수가 없었다. 일 끝나고 저녁에는 딜러 일을 보러 다녀야 했기 때문에 살이 빠지는 것
같았다.
황태석 이사는 아무래도 철인인 것 같았다. 그는 보희가 정리해서 준 일을 가지고 밤새 야
근을 했고 아침이면 항상 그녀보다도 일찍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라고 본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작은 재산인 차를 타고 보스란 술집으로 향했다. 월요일 밤이라 그런지
차가 별로 막히지 않았다. 주차를 하고 술집
정문으로 향하니 술집 앞에서 기도를 보는 남자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오늘도 멋진 밤이네요, 누님.”
나이는 그녀보다 2살이나 많은데 항상 누님이라고 하는 저 치는 겉만 번지르르한 건달이었
다. 보희는 처음 왔을 때 그들이 그녀에게 추파
던지는 것에 대해 한동안 고생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취객한테 당하고 있을 때 많
이 도와주어서 그들의 행동이 약간은 용서가
되었지만 말이다.
“누님 소리 좀 그만해요. 나이도 많으면서. 오늘도 사람이 많은 가 봐요?”
“그렇죠, 뭐. 갑부집 도련님들이 많이 와야 우리 월급도 나오니까 좋지 뭘. 들어가 봐.”
보희는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 갔다. 옛날 서양에서 벽에 걸어 장식할 법한 금으로 도금
한 촛대 모양의 은은한 조명들이 내려가는
계단을 비춰 주고 있어서 크게 눈이 나쁘지 않은 이상 잘 보였다. 그 밑에 깔린 검고 화려
한 무늬들이 화려한 카펫을 장식하고 있었다.
뭐하나 싸구려 티가 나는 구석이 없었다.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웬만한 중상류
층이 아니고서는 들어올 엄두도 나지 않는
곳이었다.
보희는 이 곳 접대부 아가씨들이 쓰는 방으로 들어갔다. 특별한 일꾼이 아니었기 때문에 따
로 내준 룸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아가씨들과
같은 룸을 쓰고 있었다. 거의가 20대 초반과 10대들이 그 방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수다를
떨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아가씨들이 많았고 종종 벌써 취한 아가씨들도 눈에 띄었다. 그녀들은 자신들과 다른 일을
하며 돈을 버는 그녀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질투를 하며 그녀를 괴롭히기 일쑤였지만 그녀의 따끔한 말 한마디에 콧소리만 내고는 화가
나서 나가 버리기도 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끼고 있던 렌즈를 빼서 보관함에 넣고 화장 케이스를 열고 분장을 시작했
다. 처음에는 화장을 이렇게 까지 짙게 하진
않았었다.
이곳에서 일을 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기 위해 다른 기업에 이력서를 넣은 적이
있었다. 그때 면접관이었던 나이 지긋했던 남자
이사가 그녀를 알아 본 것이었고 보희는 민망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하루 종일 운
적이 있었다. 자신의 생활에 큰 보탬이 되어
주는 일이 그녀에게 큰 장애가 된다는 모순적인 상황이 그녀를 슬프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는 항상 짙은 화장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곳 접대부들은 나이 속이려고 저렇
게 화장을 한다고 노골적으로 비꼬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비꼼으로 그녀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
이 상책이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속눈썹을 붙이고 자신의 눈 색깔이 부각되도록 연녹색 아이 섀도를 바르고 검은 색 아이라
이너와 마스카라를 칠하고 검붉은 립스틱을
발랐다. 그리고 머리를 틀어 올려 그녀의 우아한 목선을 드러 냈다.
민소매의 검은 색 차이나 풍 드레스를 입었다. 타이트한 롱스커트에 허벅지까지 트임이 있
는 옷이어서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많이
드러내야 했지만 여기 일하면서 돈을 많이 벌게 해준 옷이기도 했다. 여기서 같이 일하는
한 딜러 일을 보는 남자가 그녀에게 조언해 준
것이었다. 그 딜러는 같이 카지노에서 일하던 남자 선배였는데 이곳에서 카드 일을 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유일하게 친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싫다고 거절했다가 수입이 그냥 그래서 시험삼아 한 번 해보았는데 효과
만점이었다. 몸은 팔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위안했지만 말이다.
그녀에게 첩으로 들어앉으라는 손님들도 많았지만 그녀는 고객이라는 이름 하나로 무진장
참고 버텨야만 했다.
그녀가 모든 준비를 다 마치자 총지배인이 들어 왔다.
“그린캣, VIP2호실에서 카드 한다니까 들어가 봐. 혜미 너는 초희랑 교대해라. 손님들이 짖
꿎어서 애를 술로 보내 버렸다. 넌 술
주는 대로 다 받아 먹지말고 알았어?”
“알았어요. 언니 가요.”
혜미라는 아가씨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룸을 나섰다. 그녀보다 9살이나 어린 혜미는 그녀처
럼 병든 노모를 먹여 살린다고 어려서부터
일하기 시작한 불쌍한 아이였다. 그녀를 언니처럼 따라서 동생 같기도 했다.
그들은 지하 2층 계단으로 내려갔다. 술장식을 잡아당기자 문이 스르르르 열렸다. 상습적인
불법 도박을 좋아하는 상류층 인간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VIP고객 중에서 최고 부자들이 아니면 들어오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그녀가 들어간 방에는 벌써 한 명의 남자 손님과 술이 떡이 되어 누워 있는 초희가 엉겨 누
워 있는 민망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아슬아슬한 옷 밖으로 이미 나와 있었고 그 남자는 그 가슴을 열심히 탐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 오빠. 이제 나하고 놀아야지. 언니 언니 빨리 일어나.”
술에 취한 초희의 옷을 세민이가 혜미를 도와 일으켜 세웠다. 세민의 눈은 보희와 마주치기
민망해 하고 있었다. 순진하긴 세민이나
보희나 마찬 가지였으니까 말이다.
세민이 슬며시 웃으며 그녀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같이 일해 좋은 점은 서로 힘이 된다는
것이지만 나쁜 점은 안 좋은 모습들을 같이
감상해야 한다는 점이 있었다.
“딜러를 볼 그린 캣입니다. 손님, 이 테이블로 모여 주시겠습니까?”
술집이라기 보다는 집에서 남자 손님들을 위해 인테리어한 것 같이 편안한 분위기였다. 마
호가니 색 가구들로 꾸며지고 명화 모조품이 걸려
있었으며 넓찍한 테이블로 몇 사람이 누워도 될만한 크기의 술테이블이 이루어져 있었다.
그 밑으로는 카드를 즐기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된 한평반정도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카
드가 미끄러지지 않게 세팅된 훌륭한
테이블이었다. 술에 만취된 한 손님은 혜미와 어울렸고 나머지 네명은 그녀 주위로 모여 앉
았다.
한 손님이 그녀의 힙을 건드렸다.
“손님, 저는 접대부 아가씨가 아니니 이런 행동은 삼가하십시오.”
그녀가 웃으며 점잖게 말하자 그도 하던 동작을 그만 두었다.
“이런 거 하지 말고 내 정부나 하면 돈도 많이 줄텐데 아가씨?”
그녀가 그냥 미소만 짓고 말자 그는 입맛만 다셨다. 이곳에서 추태를 부리다간 밖에 있는
기도에게 쫒겨 날 것이고 다신 이곳에 출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소위 말하는 상류층 인간들의 규칙 중 하나였다.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던가. 이곳 사장이 알아주는 집안의 한
사람이라 그의 명예에 누를 끼칠 것을 생각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럼 게임 종류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그녀가 게임 선택을 물으려 할때 뒤에서 문이 열렸고 테이블 손님들이 하나같이 일어섰다.
보희가 돌아보니 앗 소리가 터질뻔 했다. 바로
황태석 이사였다. 빌어먹을. 속으로 그녀는 욕설을 퍼부었다.
“이자식, 정말 오랜만인걸.”
한 남자가 그를 끌어안으며 반겨 했다. 다른 남자들도 그에게 모여들어 악수를 하며 포옹했
다.
“죽은 줄 알았잖아. 귀국했으면 얼른 보고를 해야지. 뭐가 그렇게 바빠?”
“수호, 정민, 준태, 명규, 진짜 반갑다. 일이 많아서 짬이 나야 말이지. 잘 들 지냈냐?”
그가 저렇게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을 일주일을 같이 일하면서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간
간이 그녀와 말을 썩을 때 아니면 거의 웃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서류를 보면서 항상 인상을 쓰기 일수였다. 냉혈인간은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석이는 장가가서 애 아빠다. 이제.”
“그래? 근데 저기 퍼져 있는 놈 문석이 아냐?”
그가 혜미 무릎 배고 누워 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말도 마라. 마누라 등쌀에 몇 달만에 나오더니 저 모양이다. 여자 붙들고 지 마누라 찾으
니 누가 좋아 하냐? 쟨 신경 쓰지 마라.
일단 한잔하자.”
게임은 시작도 않고 그들은 보희를 세워 놓고 술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이 대화에 언제 낄지
머물다가 순간적인 틈새를 공략했다. 당장
이방에서 나가고 싶었다.
“손님, 게임은 다음에 하시겠습니까?”
그린캣이라 불리는 그녀의 그윽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들 모두가 그녀를 주시했다. 얼굴보다
는 그녀의 가슴과 다리에 시선들이 고정되고
있었다. 그녀는 태석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깜짝 놀랐다. 들킨 것은 아닌지 걱정
이었다.
태석이 물었다.
“게임?”
수호라는 순진하게 생긴 남자가 대신 대답했다.
“카드 게임 하려고 불렀는데 너 왔으니 일단 회포나 풀어야지. 게임은 나중이고.”
태석은 친구의 설명을 들으면서 한시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들킨 걸 거야.
“게임 좋지.”
“임마, 얘기나 하고 하지. 이봐, 저쪽에 앉아서 기다려.”
보희는 찜찜한 기분을 없애지 못하고 문 앞 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곁눈질을
하다가 그와 눈이 마주쳐서 얼른 눈을
돌렸다. 되도록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지만 자리의 위치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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