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을 보고 웃는다
지은이:이정석
차례
글마당을 열며
마당 하나 / 역설의 사랑법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며
궁합 보지 않으려면 확실히 연애하라
첫사랑과의 해후
남존여비는 사이비
유교식 사랑법
후세교육은 궁합에서부터
가정 떠나 어디서 사랑하나
살아 있는 부처 찾은 총각
때로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효
한 세상에 친구 하나
마당 둘 / 마음으로 그리는 인생
여행하며 그린 자화상
흐르는 물에는 비춰볼 수 없는 얼굴
향기나는 인생
고기와 그물
즐기지 않는 즐거움
나 자신을 알라
꽃에서 맡는 물 향기
손톱 밑에 쌀 한 톨 못 가져가네
죽어야 할 이유
마당 셋 / 청학은 어디로 날아갔나
팔아먹은 갓
청학은 어디로 날아갔나
혼쭐난 NHK
법만 내세우는 망나니
유교에 대한 오해
다종교 사회에서 사는 지혜
종교의 노예가 되려는가
지구상 최고의 목적
마당 넷 / 흔들리는 세상 풍경
갓 쓰고 당한 봉변
배꼽티 입은 아가씨
텔레비전 씨에게 보내는 편지
최고의 투기꾼
분서갱유하고 싶은 세상의 횡설수설
체증 앓는 세상
길에서 만난 두 사람
서당에서 만난 요즘 아이들
무자식이 상팔자인가
마당 다섯 / 세계의 꽃으로 필 우리
강남 유자가 강북 가면 탱자 된다.
누가 묻거든
모든 사물은 저마다 개성이 있다
지구의 방랑자
자만심과 열등 콤플렉스
미친놈, 호로새끼, 개잡년
갓 쓴 시위대
인간시대
세계의 꽃으로 필 우리
*지은이 이정석은 낙안 읍성에서 태어났다.
이십여 년 동안 구례, 남원, 논산 등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현재 청학동에서
훈장으로 후학 지도에 여념이 없다.
그동안 각기업체, 대학, 사회 단체에서 수십 회의 특강을 했고, 91년, 95년에는
미국에 건너가 교민들에게 강의를 통해 한민족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힘써 왔다.
글마당을 열며
그 안개가 어디서 올라오는지 궁금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스멀스멀 산자락을
타고 올라온 그 안개는 청학동을 넘어 천왕봉 쪽으로 사라지곤 했다.
언제쯤이었을까? 나는 그 안개가 올라오는 방향을 따라 내려가본 적이 있다.
가도 가도 산이었다. 나는 다시 산으로 올라왔다. 해마다 안개는 그렇게 엷은
연두빛으로 올라와서, 옴싹 청학동을 하얗게 감싸 안았다가 연보라빛이 되어
산 너머로 달아나곤 했다.
나는 어느새, 그 안개가 청학이려니 여겼다. 다시 어느 날, 나는 안개를 따라
내려갔다. 태백산맥 중턱에서 소백으로 갈라진 줄기가 좌로 휘감는 척하다가
갑자기 솟아버린 그곳에는 지리산이 있었고, 그 산이 빠져내려간 바다 쪽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변에 앉아서, 안개는 그 강에서 올라오는 걸거라고
여겼다.
또 세월이 흘렀다. 아니었다. 안개는 강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안개는 세상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세상을 봤다. 세상도 나를 봤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참 많다. 청학동의 안개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었다.
나도 그들을 보고 웃었다. 세월은 절로 흘렀고 우리의 그 웃음도 흘렀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세월 동안 만나 세상 사람들에게 얘기를 하고 싶다. 두런두런
밤이 새도록, 청학동에 날아오던 그 뽀얀 청학의 얘기며, 초봄에는 할미꽃이 바로 서
있더라는 얘기, 달이 뜨지 않는 밤에도 달맞이 꽃이 피곤 하더라는 얘기를….
그러나 나는 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이런 얘기들에 시큰둥하리라는 것을,
어쩌면 너무 시시해서 큰 하품과 함께 잠이 들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또 안다. 그런 얘기가 시시하게 느껴질 때, 도시의 시멘트 벽 사이에서
핏발 선 눈으로 발걸음을 재촉할 때 우리는 이미 사람 사는 얘기를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인생의 멋은 이미 신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생의 멋은 이미 어쩌면 먹거리의 맛과 같다. 맛없는 빵에서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듯이, 멋이 없는 인생에서는 사는 즐거움을 찾을 수가 없다. 또 빵의
겉에 바른 설탕만으로는 진실로 그 빵을 맛있게 할 수 없듯이, 인생의 겉멋도
진실로 사는 즐거움을 주지는 못한다. 요즘 우리는 그 겉멋을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된 영문으로 베르디의 오페라 앞에서만 황홀한 표정이고 그 신명나는
판소리 한 판 앞에서는 그토록 무덤덤한가? 피카소 앞에서는 지그시 눈을 감는
척하면서 추사의 그 요염한 곡선은 볼 줄을 모르는가?
로스앤젤리스의 거리를 걸어보라. 수많은 민족들이 자기 민족의 멋을 내세우며
문화전쟁을 벌이고 있다. 개방된 세계 속에서 내 멋을 찾는 몸부림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세계화란 곧 우리화 되어야 옳다. 된장 한 사발이라도 우리 것을
들고 세계무대에 나서야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멋을 가꾸는
일이라야 우리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는 길이 되고 절로 사는 즐거움을 찾는
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혹자는 그렇게 묻는다. 사실,
해답은 스스로가 알고 있다.
모든 문제는 내 자신에게 달려있다. 내 자신만 책임지면 된다. 수만 년을
누려온 세상이라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역사에는
완성이라는 게 없다. 사람에게 완성이라는 것이 없듯이. 역사는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서 흐른다. 인생도 역시 자신을 완성해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래서 말 한
마디도 인생이요, 눈빛 하나 태도 한 가지, 보고 듣고 느끼고 사랑하고 울고
웃고가 모두 인생이다. 인생은 그저 산다는 데는 별의미가 없고 뭔가 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나는 본다. 뭔가 해야 할 인생, 완성해가야 할 인생을 포기해버린
사람들을 본다. 아니 어쩌면 팽개쳐버린 듯한 인생인지도 모른다. 안개는 해마다
청학동으로 올라왔지만 오는 걸 봤을 뿐, 가는 걸 봤을 뿐 느낄 수가 없었다.
안개는 그저 스쳐 지나갔다. 인생도 어쩌면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를 논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압구정동의 그 젊은이들
얘기를 하자거나 권력을 잡고 어쩔 줄 몰라했던 사람들의 얘기를 하자는 건
더더구나 아니다.
그저 사람 사는 얘기를 해보자. 잃어버린지도 모르고 있는 우리의 그 멋을
얘기하고 홀로 돌아누워서도 웃음이 나오는 그런 행복을 얘기해보자.
세인소아 아소세–세상 사람들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을 보고
웃는다.(“부응경” 중에서)
그 웃음의 뜻을 누가 알까? 청학동을 가을로 만들어 놓고 천왕봉 넘고
정령치를 비켜서 소백산맥 줄기를 따라 오르고 있을 그 안개라면 알까?
지난 여름 아빠 품에 안겨와서 한사코 내 수염을 만져보자던 세 살바기 그
소녀라면 알까?
세상 사람들아! 그 움켜쥔 주먹들을 풀자. 그 옹골찬 눈빛도 풀자. 맺힌
한이 있거든 안으로 울고 사랑할 일이 있거든 꽹과리로 울리자. 우선 나를
사랑하고 때로는 다독거리고 덮어주고, 그래서 오천 년 살아온 그 멋 따라
살자. 세상 사람들아.
청학동 가을 안개가 오던 날
훈장 이정석 배
마당 하나 / 역설의 사랑법
아무리 궁합의 중요성을 말해도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으니,
바로 확실하게 연애를 하는 것이다.
제대로 연애를 하는 쌍을
서로 기가 맞는 것이고
그것은 궁합으로도 결국 좋다는 것이다.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며
하루의 반나절이 지난 시간에, 점심을 먹고 마루에 앉아 앞산의 능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그 어떤 희열을 느끼곤 한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인생의
무동이 능선을 타고 춤을 추는 듯하고,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무궁무진으로 조화를 부리는 듯하다.
내가 앉아 있는 곳도 지리산이요, 바라보는 앞산도 지리산이니, 지리산에 안겨
지리산을 바라보는 것이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어머니를 바라보는 갓난아기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어머니의 품에 안긴 갓난아기가 너무도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어머니의 젖을 빨아대듯 나는 어느새 능선을 타고 춤을 춘다. 마음이
이미 거기에 가 덩실덩실 춤을 추니 몸도 덩달아 신명이 오른다. 자연은 진정
신이 만든 최고의 예술품이요, 최고의 가르침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능선이 갈아입는 계절의 옷을 볼라치면, 왜 그것이 최고의
예술품이요, 최고의 가르침인 줄을 안다. 사람이 감히 흉내내기에는 너무도
신묘하고 감동적이다. 어느 도공이 그와 같은 모양과 빛으로 도자기를 빚을
것이며, 어느 음악가가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을 연주할 수 있겠나. 그러니
필설로도 당연히 그것을 다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요즘 같은 가을의 능선은
그 자체로 인생의 교과서가 된다. 능선에 깔린 뭉게구름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나는 그 구름을 따라가다가 그만 동심에 젖어버린다. 세상에 대한 꿈만으로도
넉넉히 아름다울 수 있는 마음, 거기에 이르면 나는 구름 한 조각으로도 부러울 게
없는 부자가 된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구름 한 조각이나 풀잎 하나 만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으니 인간은 그 얼마나 축복 받은 존재인가. 아귀다툼에 찌들린
세상이라지만 때로는 별 하나만 보고도 풍요로워질 수 있으니 인간은 그 얼마나
희망적인 존재인가. 더럽혀진 정신이 판을 친다지만 문득 돌아온 동심만으로도
마음을 씻을 수 있으니 인간은 그 얼마나 깨끗한 존재인가.
자연은 그러나 부풀기만 하는 가슴에게 눈을 뜨라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자가 된 나를 가난하게 만들어 버린다. 흘러가고 흘러오는 구름 속에 능선의
풍경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그 변화를 따라가다가 나는 그만 이렇게 묻고 만다.
인간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 무상함에 인생이 사로잡히면 동심으로 콩다콩
뛰었던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시리도록 서늘한 바람이다. 그러나
몸을 움츠리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일상의 때로 막힌 가슴을 뚫어주곤 하니
차라리 온몸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수 있는 무상함이다. 나는 왜 살고 있는가.
왜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그토록 가슴을 앓고, 왜 누군가를 용서하려고 그토록
괴로워하고, 왜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그토록 애를 쓰는가. 다 부질없는 일이
아닌가. 아니다. 그렇게만 묻는 게 아니다.
이렇게 묻기고 한다. 무상의 바다를 떠도는 주제에 나는 왜 그리도 어리석은
나를 버리지 못했던가. 무엇 때문에 나는 그 누구를 용서하지 못했던가. 무엇
때문에 나는 그 누구를 이해하지 못했던가. 무엇 때문에 나는 그 누구를
사랑하지 못했던가.
묻고 또 묻노라면 산은 묵직한 저음으로 대답한다. 네가 바라보고 있는 산처럼
살라고, 저기 흘러가고 흘러오는 구름처럼 살라고, 저기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처럼 살라고. 그러면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옆에 있던
내 아이들은 그 고갯짓이 무슨 뜻인 줄 몰라 저희들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이들도 커서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되면 그 능선을 바라보며 그렇게 느낄
것이다.
가을의 능선은 찬바람이 불어오면 겨울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다. 눈이
쌓이고 그 주위를 겨울새들이 간혹 날아다니며 적막을 깬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적막과 고요 속에 묻힌다. 겨울새마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면 바람이
때때로 그 적막과 고요를 깨울 뿐이다.
집 주위에 있는 대밭에서 부는 바람이 적막에 묻혀 있는 나를 깨우곤 한다.
어찌 들으면 소나기가 퍼붓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가야금과 거문고가
합주를 하는 것 같고, 또 어찌 들으면 파도가 철썩거리는 것 같기도 한 대밭의
바람 소리는 고요한 능선까지 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그 바람이 멎으면 주위는
더 깊은 적막에 휩싸인다. 적막을 깨우쳐 주기 위해 능선을 흔들어 놓고 나를
깨웠단 말인가.
고요에 묻혀 귀를 기울이노라면 바람은 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 소리가 들려온다. 헌데 그 소리는 사람의 울음과 너무도 닮았다.
적막한 자연이 안타까워서일까. 살아 있어야 할 것이 죽은 듯이 보여
슬펴져서일까. 아닐 것이다. 사람이 그저 그렇게 듣는 것뿐일 것이다.
자연은 안다. 죽은 듯이 움츠리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끝내 살아날 것임을
안다. 자연은 말한다. 늘 피어 있기만 하는 꽃은 없음을 말한다. 죽음이 있어야
새로운 삶이 있다. 적막함을 견뎌야 환희의 찬가를 부를 수 있다. 고독의
슬픔을 알아야 어울림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침묵의 무게를 알아야 말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번뇌의 고통을 겪어야 평안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 겨울
능선이 그렇게 말한다.
생로병사로 이어지는 인생에 어찌 고빗길이 없겠는가. 살아있는 사람의 입에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들이 수시로 튀어나온다. 한 번뿐인 인생임에도
우여곡절은 참으로 많다. 일에서 실패하면 사람의 심장은 얼어붙는다. 꽁꽁
얼어붙은 심장을 끌어안고 살아갈 의욕마저 잃어버린다. 도대체 무엇으로 산단
말인가. 그러나 겨울 능선의 풍경이 비록 적막하다 하더라도 아름다운 소리를
품고 있듯, 그렇게 얼어붙은 심장 속에는 따뜻한 피가 숨어서 흐르고 있다.
인간이 의지의 눈만 세우면 언제나 볼 수 있고, 지혜의 손만 움직이면 언제나
만질 수 있다. 의지와 지혜를 외면하면 봄을 기다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봄이
와도 봄이 온 줄을 모른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어깨에 묻은 눈을 털고 다시 봄의 옷으로 갈아입는 능선을 보라. 그것을
보노라면 싹이 트면서 내뿜는 향기가 느껴지고, 생명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오감이 다시 태어난 생명 앞에서 춤을 춘다.
우는 듯하던 계곡의 물은 덩달아 노래를 부르고, 미심쩍게 날아다니던 새들은
마음껏 지저귄다. 대지에 딛는 사람의 발걸음은 경쾌해지고, 온갖 짐승들도 날고
뛰고 어슬렁거리며 찾아온 봄을 만끽한다.
어느 시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물었다. 그 시인은 빼앗긴 나라에도
봄이 옴을 이미 믿고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봄이 옴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좌절하고 변절하다가 그대로 죽었다. 얼어붙은 심장만 끌어안은 채
봄이 옴을 믿지 않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겨울은 끝나지 않는다. 봄이
와도 봄이 온 줄 모르는데 어찌 겨울이 갔다고 말할 수 있겠나
봄의 능선은 생명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희망이 어떻게 사람의 가슴속으로
들어오는지, 우리 삶이 왜 기나긴 인내를 요구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근엄한
소리가 아니라 태연한, 너무도 태연한 자연의 소리로 말해 준다. 그토록이나
아름다운 옷을 입은 능선은 때가 되면 다시 옷을 갈아입는다. 역시 너무도
태연하게 몸을 바꾼다. 봄에 입은 옷이 아름답다 하여 그것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다 그대로의 아름다운 옷을 입을 수
있고, 끝내는 또 봄이 오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앉아 있는 마루는 좁지만, 거기에 앉아 능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상향의 청학동도 끝내 만들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푸른 학은 지금
어딘가에서 날고 있을 것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우리에게로 날아올
것이다. 가슴 태우며 기다린 우리를 무색하게 만들면서 태연하게,. 태연하게
찾아오리라.
궁합 보지 않으려면 확실히 연애하라
연애지상주의자들이 득세한 세상에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풍경이 하나 있다.
요즘의 젊은 부부들이 중매 결혼이냐,. 연애 결혼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보이는
반응들이다.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한 측에서는 ‘연애요!’라고 개선 장군처럼
당당하게 대답하면서 중매를 진화가 덜 된 사람들의 수작쯤으로 여기기도 하고,
중매를 통한 측에서는 무슨 죄라도 지은 듯이 모깃소리로 ‘중매요’라고
대답하면서도 묻지도 않았는데 중매 후에 사귀는 기간이 있었으니 ‘중매 반 연애
반’이라는 사족을 단다.
연애라는 화려한 말에 쫓겨 초라하고 불쌍해진 말 중매, 그에 못지않게 요즘
젊은이들로부터 퇴물 기생 취급을 받는 게 또 있으니 바로 궁합이다. 궁합이라는
말만 나오면 대명천지 이 문명 사회에 무슨 미신이냐며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가
하면, 심심풀이 재미로 본다며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노리개 취급을 하기 일쑤다.
그러나 궁합은 결코 서양식의 학문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말하는 미신도 아니요,
노리개 취급을 당할 만큼 하찮은 게 아니다.
학교건 직장이건 사회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은 어떤 상대방을 만나 서로 기질이
통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느끼고,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대로 서로 온도가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경험하게 된다. 기질이 통하고 온도가 맞으면 가까위지는 것이요,
그렇지 않을 경우는 나름대로 노력을 해 보아도 잘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상적으로 봐서 모든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왜 어떤 사람은 절로 끌리는데 , 또 어떤 사람은 나름대로 노력을 해도
멀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만물이 그렇듯 사람에게는 생명의 근원 속에 기가 있고, 그것은 개인에 따라
다르게 드러난다. 누군가에게 끌리고 끌리지 않고 하는 것은 넓게 봐서 기의
작용이라 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서로 기가 맞지
않으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가 어렵다. 100볼트 제품을 220볼트 전선에
연결시키면 당장 망가지듯 기가 맞지 않는 남녀는 행복하게 어울릴 수 없는
것이다.
남녀의 기가 어울리는지의 여부를 보는 것이 바로 궁합이다. 그것은 동양의
심오한 자연과학인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것으로, 서양 과학의 잣대로 함부로
난도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래에 들어와서 서양 물리학의 최첨단 이론들이
동양의 자연과학과 사상에 근접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이 이를 웅변적으로
입증한다. 사주를 가지고 두 남녀의 기가 맞는지 여부를 보는 궁합은 신비주의도
미신도 아닌 엄연한 과학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궁합이 심오한 자연과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경험적으로 궁합을 비판하는 이들도
많다. 예를 들어 사주를 보는 어떤 사람을 찾아갔더니 하늘이 맺어 준 궁합이라
했는데, 다른 사람을 찾아가니 같은 사주를 놓고 절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면 당사자는 혼란에 빠질 것이고, 당연히 사주를 바탕으로 한
궁합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일들은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요즘 세상에서
사주를 보는 사람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돌팔이들이라 할 수 있다. 음양오행의
사상과 과학은 난해하고 심오한 것으로 짧은 공부와 수도로는 그 깊이를 제대로
알아낼 수 없다. 적당히 배운 사람들이 아는 체를 하고 흉내를 낼 때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사들도 실력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력이 좀
모자라는 사람이 있고, 또 아주 돌팔이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에 완벽한 의사가 없듯 완벽하게 궁합을 볼 수 있는 사람을 찾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다. 그러나 완벽한 의사가 없다고 병원에 가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신뢰가 가는 의사를 찾아가서 자기 병을 고치면
되는 것이다. 궁합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로 생각하면 된다. 만약 어느 한
쌍의 남녀가 궁합을 보았는데 절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치자.
이들은 어찌해야 할까. 사주를 보는 몇 사람을 더 만나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이 병원에 가서 불치병 진단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다. 불치병 진단을 받은
사람은 오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른 병원을 찾아보지 않겠는가. 오진이 적지
않다는 게 의학계의 현실이란 말을 들었다.
그런데 다른 병원들에서도 마찬가지 진단 결과가 나온다면 그 사람은 자기 병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궁합으로 결혼 불가 판정을 받은 남녀가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같은 소리를 들었다면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갈라서야 한다.
각설하고, 아무리 궁합의 중요성을 말해도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으니, 바로 확실하게 연애를 하는 것이다.
기가 맞지 않는 쌍을 제대로 연애를 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하자면 제대로
연애를 하는 쌍을 서로 기가 맞는 것이고 그것은 궁합으로도 결국 좋다. 적당히
조건만 따져서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연애, 참모습을 감춘 채 상대방에게 자신의
겉모습만 서로 내보이며 적당히 만나서 적당히 즐기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겉모습만 서로 내보이며 적당히 만나서 적당히 즐기는 연애, 될대로 되라는 식의
체념 섞인 연애 등으로는 두 남녀가 진정 어울리는 한 쌍이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이런 어설픈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한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결혼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확실한 연애를 통해 기가 맞는지 여부를 볼 수 있다고도 했는데, 여기에는 숱한
문제점들이 생긴다. 바로 요즘 사회,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성적
혼란과 방종과 타락, 그로 인해 생기는 숱한 문제점들이다.
섹스는 아름답고 신성한 것이다. 그것은 삶의 소중한 보석이요, 인간이 지닌
예술성의 한 극치요, 생활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활력소다. 옛시절에도 섹스를
단순히 애를 낳기 위한 행위로 보는 선비와 섹스의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만끽하는
선비를 놓고 볼 때 뒤의 선비가 더 도가 높은 것이라 했다. 섹스를 동물
근성쯤으로 치부하는 것은 미개적 시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중한 보석은
함부로 다루는 것이 아니듯 섹스는 함부로 대하거나 조절 능력을 상실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그 복을 금세 화로 바꾸어 버린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다루지 않는 것에 대한 응징인 셈이다.
젊은이들에게는 감정을 조절할 능력이 부족하다. 궁합을 보지 않으려면 확실히
연애하라 했지만, 그런 연애를 하다 보면 감정 조절능력이 부족한 젊은이들이
숱한 성적 문제를 만들어 사회를 타락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만든다. 정조
관념이 점점 퇴색해지고 혼전관계에 의한 낙태, 미혼모 급증, 사생아 출산 등이
뒤따르게 된다. 이런 현상들은 몇몇 개인의 불행이라는 차원을 넘어 이제는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
낙태의 문제만 보더라도 그것은 이미 전체 사회 구성원의 윤리 의식을 마비시킬
정도로 타락한 양상이 되어버렸다. 근래에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사건들을 보며
온 나라가 탄식을 했지만, 그 저변에 깔린 인명 경시 풍조를 반성하고 참회하는
모습은 희미하게만 보인다. 낙태란 엄격히 보면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골이다.
뱃속의 자식은 자식이 아닌가.
혼전 성관계를 가져야만 확실한 연애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에 따라 가정의 행복이 좌우되고, 가정의 행복이 사회 평화의 기본이
되니 서로 이성을 잃지 않고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이 확실한 연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뜨거운 연애를 하는 젊은이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현실이 말해
주고 있다.
궁합을 끝내 보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위해 편법이지만 확실한 연애가 필요함을
말했다. 그런 연애 끝에 결혼을 해서 잘산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지만, 그렇지
못했을 경우 생길 수 있는 숱한 문제들은 어떻게 할 것이다. 지혜로운 행복의
조건을 늘 염두에 두면서 연애지상주의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는다.
첫사랑과의 해후
최근에 서울에 사는 한 중년 여인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생김새도
짐작할 수 없고 목소리도 낯서니 그저 중년 여인이라고 할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 때, 그 이름 석자가 멍해진 머릿속을 톡톡 두드렸을
때, 내 가슴은 묵직하게 밀려오는 어떤 농밀한 향기에 감싸여 버렸다. 그 중년
여인은 바로 내 첫사랑이었다.
처음으로 맺은 사랑, 첫사랑. 세상에 이보다 더 가슴 뛰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너무도 순수했기에 그 어떤 미숙함이나 부끄러움마저도 다 품어버리고
빛나는 순수함, 그것이 첫사랑이다. 끝내 맺지 못한 미완의 꿈이었기에, 다른 그
어떤 꿈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아쉬운 꿈이었기에, 가슴속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문득문득 고개를 내미는 얼굴, 그것이 첫사랑이다.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차마 꺾을 수 없는 꽃처럼 그저 향기만으로도 취하는 추억, 그것이 첫사랑이다.
한 마을에서 자란 그녀와 나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구슬치기도 같이 하고,
온갖 장난으로 함께 웃고 울던 이웃집 소녀, 그것이 처음으로 내게 다가온 그녀의
모습이었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그 많은 놀이와 장난들 속에서 우리는 무슨
말들을 나누었을까.
철이 들면서 우리는 그 동화의 세계에서 살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순진무구했던 그 시절을 뒤로 하고 우리는 변해 갔다. 서로에게 의미있는 이성이
된 것이다. 소 닭 보듯 서로를 바라보는 그런 단순한 이성이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로 인해 가슴이 부풀고, 상대방의 부재로 인해 가슴조이는 그런 관계가 된
것이다. 그런 감정이 어떻게 싹트기 시작했을까.
갸름한 얼굴의 그녀는 선한 눈빛을 띠고 있었는데, 그 눈빛을 느끼면서 사랑의
감정이 시작된 것일까. 코 흘리던 시절에 쌓은 정이 그만 그렇게 번한 것일까.
알 수 없다. 사랑은 그렇게 알 수 없이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당시 나는 십대 중반의 나이로 객지로 다니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철저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정규 교육을 그만두고 각지의 서당들을 찾아다니며
한문과 유학을 배운 것이다. 그녀 역시 직장을 얻어 서울에 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껏해야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밖에 볼 수 없었다. 명절 때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은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더욱 가벼워지곤 했다. 그녀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가슴을 이미 벅차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고향에 와 있다
해도 사람들의 눈 때문에 마음대로 만날 처지는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그
눈빛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 속에 속절없이 밤이
지나가곤 했다.
다행히 우리 사이에는 충직한 파발꾼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녀의
남동생이었다. 나는 귀여운 그 파발꾼을 통해 그녀에게 쪽지를 전하곤 했다.
약속 시간을 주로 밤이었고 장소도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으슥한 골목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확인하는 서로의 눈빛, 그 짜릿함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런 만남이 시작될 무렵에는 주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오랫동안 기다려
온 그 시간을 가 보내곤 했다. 부끄럼 많은 어린 연인에겐 그것만으로도 벅찬
순간들이었다. 결혼이라는 말만 나와도 얼굴이 붉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주로 직장에서 일어난 일들과 느낌을 말했고, 나는 서당에서 겪었던 경험들을
들려주었다.
명절과 명절 사이의 그 긴 시간 동안에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그 편지
속에 만나서 하니 못한 말들을 적을 수 있었다. 세상을 다녀 봐도 너처럼 마음
터 놓고 얘기할 수 있는 편한 여자는 없더라, 라는 표현에서 좋아한다, 혹은
사랑한다는 표현까지 속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게 편지였다. 편지로 마음의
갈증을 달래다가 명절이 오면 우리는 다시 우리의 방식대로 남들의 눈을 피해
만날 수 있었다.
사랑이 익어갈수록 두려움도 깊어지는 것일까. 우리의 소박하고 순수한 만남을
앞날에 대한 기대와 불안으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를 따르며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나의 이상적인 여성, 이상적인
반려자가 될 수 없을 것 같다고도 했다. 비록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몇 해를
사귀다 보니 우리 앞에는 결혼이라는 문제가 어느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주면서 사는 게 결혼이라며 그녀를 격려해 보기도 했지만,
우리 사이에 생긴 미묘한 틈을 완전히 메울 수는 없었다. 더구나 우리에겐 보고
싶을 때, 할 말이 있을 때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없었다.
이 서당에서 저 서당으로 여전히 나는 객지를 떠돌며 공부를 해야 했고, 그녀는
서울살이에 차츰 익숙해져 갔다. 그녀와 내가 함께 하지 못한 그 많은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스무 살이 넘으니 서로의 생각도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한복을 입은 나와 양장을 한 그녀는 서로 만나는 것이
어색해졌다. 물론 옷 때문만이 아니었다. 우리 사이에 파고든 미묘한 틈,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점점 커지고 높아졌다. 사랑이 어떻게 왔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듯 그 틈도 어떻게 생기기 시작했는지 딱 하나로 꼬집어서 얘기할 수는
없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세월이리라. 사랑을 가져다 주었다가는 시샘을 하듯
이별을 불러오고, 이별 후에는 또 추억을 새겨주는 것, 그것이 세월이 아니겠는가.
그 세월의 장단 속에서 우리는 주어진 생애를 나름대로 꾸려가는 것이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추억하면서.
첫사랑이었던 그녀의 전화가 너무도 뜻밖이었던지라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언제 만나서 차 한 잔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만나기가 두렵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두려운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비쳐질지가 염려된다는 뜻으로
들렸다. 소중한 첫사랑의 추억이 달라진 현재의 모습 때문에 깨질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이었다.
어쩌면 그럴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 차 한 잔 나누었다고 첫사랑의 추억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서로의 달라진 모습을 보며 추억의 상당
부분이 손상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가슴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영원한 사랑으로 남겨두고 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가슴에
소중히 담아둔 채 어쩌다 가끔씩 그 순수한 열정을 떠올릴 깨 첫사랑의 추억은
삶의 향기가 될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쓰라렸던 것이라 해도 추억은 우리를
좀더 아름답고 순수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러하듯.
세월은 그래서 때로는 마술사가 된다.
아내는 지금 내 옆에서 잠들어 있다. 잠에서 깨어나면 불순할 수 없는 이
첫사랑의 추억을 아내에게 들려줘도 좋으리라. 아내는 웃을까? 아니면 공연히
질투의 표정을 지을까? 아마 웃을 것이다.
남존여비는 사이비
여성상위시대라는 말을 종종 들을 수 있는데, 우스운 말이다. 뜻인즉슨
남성보다 여성이 위에 있다는 것일 텐데, 무엇으로 위에 있단 말인가. 가정이나
사회에서 권리가 더 많고 위치가 더 높다는 뜻인가. 아니면 현대에 들어와서
무슨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나 남성보다 여성이 질적으로 우수한 인간이 됐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잠꼬대 같은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단순한 잠꼬대는 물론 아닐 것이다. 상대적으로 낮았던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졌다는 뜻일 것이다. 세상이 변했다는 뜻일 것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당했던 지난날을 남성상위시대로 보면서 그 반발 작용으로 나온 표현일
것이다. 이렇게 따져 보면 여성상위시대라는 우스운 말이 나오게끔 만든
남성상위시대라는 거만한 유물이 더 우습고 한심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누가 위에 있고 아래에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또 여자는 여자대로 각기 특성을 살려 서로 조화를 어울리는, 세상에는
가장 아름다운 짝이 될 수 있는 그런 동반자다. 그것이 선현들의 진정한
가르침이다.
그러면 왜 이 땅에서 남성이 여성을 예속시키고 비하하는 잘못된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교적 전통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다. 틀린
말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덧붙일 말이 있다. 조선시대에 잘못 이해되고
편법으로 사용된 유교의 원리 때문이지 유교 그 자체가 그런 불평등을
조장했다고는 할 수 없다. 남존여비의 악습이 유교를 편법으로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남자는 높은 위치에 있으니 그에 합당한 권리와 지위를
누리고, 여자는 그 아내 예속되어 순종하라 하는 것은 철저한 반상의 차이를 두어
양반 계급의 특권을 유지하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식 유교의 폐해라 할 수
있다. 그 잘못된 전통이 오늘날까지 내려와 여전히 ‘어디 감히 여자가’식의 말을
하는 기고만장한 남자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선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는 상하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역할 분담으로 나뉘었다. 세상에 태어나 할 일과 갖추어야 할 예의에
남녀의 구별이 생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해가 달이 될 수 없고, 달이
해가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지극히 평범한 남자와 여자의 풍경을 보자. 출산을 한 여자에게는 자식에게
젖을 풀려 영양을 고급하고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게 가장 소중한 일이 된다.
그것을 남자가 대신할 수는 없다. 하기야 소젖으로 아이를 키우는 세태니
젖병으로 남자가 먹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대들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바람직한 육아의 방법을 말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남자는 여자가 젖을 물려 아이를 기르는 동안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한다. 이런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따지고 들어가면 남자와 여자가 할 일과
갖추어야 할 예의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조화로운 역할 분담, 그것이
남녀를 구분하는 근본적이고 유일한 이유요 기준이 된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의 뜻은 단순히 남녀가 한자리에 앉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일곱 살쯤 되면
철이 들 터이니, 남자와 여자의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라는 가르침이다. 그 다른
격은 상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역할 분담을 이르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서거나 앉을 때의 전통 예법을 보면, 그 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예법에 따르면 남자는 여자를 왼쪽에 두고 여자는
남자를 오른쪽에 두는데 그것은 상대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습관으로 만들어진 단순한 오른쪽 혹은 왼쪽이 아니다.
동승서추라는 말이 있다. 동쪽에서 올라 서쪽으로 내려간다는 뜻인데, 태양을
비롯해 세상 만물의 움직임을 가리킨다. 승은 양의 기운이요 추는 음의
기운이다. 만물은 그렇게 음양의 조화에 의해 생성되고 변화한다. 그리고 모든
생명력은 태양 입자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남쪽을 향해 서는 것이 원칙이다.
남쪽을 향해 섰을 때 동쪽은 왼쪽이요, 서쪽은 오른쪽이다. 그런 연유로 음의
기운을 가진 여자는 서쪽, 바로 오른쪽을 상석으로 삼고, 양의 기운을 가진 남자는
동쪽, 바로 왼쪽을 높은 자리로 여긴다. 남자끼리 앉았을 경우, 어른이 왼쪽에
앉고 여자끼리의 경우는 그 반대가 된다.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을 때는 어떤가. 남자는 존경의 표시로 높은 자리인
왼쪽을 여자에게 내 주고, 여자 역시 존경의 표시로 오른쪽 자리를 남자에게 내
준다.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음양의 조화로 어울리는 것이다. 상하로
구분하기는커녕 역할 분담을 하면서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남존여비는 입장이나 위치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지, 남자는 높으니 가치가 높고
여자는 낮으니 가치가 낮다는 말이 아니다. 가치로 보면 둘을 같은 존재다.
다만 모든 물체에 양면이 있듯이 남녀를 양면으로 볼 때 남자를 앞면 여자를
뒷면으로 질서를 구분하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과거의 지배 논리인 그 뒤틀린
사고를 허물어야 참다운 남녀 관계를 볼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남성들이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품는 헛된 우월감을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스스로를 비하하는 열등감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면 남존여비의 잘못된 구습만큼이나 문제가 되는 것이
있으니, 남녀의 역할 분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생기는 인간 질서와 조화의 파괴가
그것이다. 남자가 할 일을 남자가 하지 않고 여자가 할 일을 또 여자가 하지
않는 성의 왜곡이 숱한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결혼한 여성의 사회 진출이라는 문제를 보자. 언뜻 보면 그동안 소외받아 온
여성이 직업을 통해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성취욕도 느끼고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만 보면
여성의 사회 진출은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한 것인가. 남성과 여성은 타고난 특성으로 부여받은
각각의 역할이 있다. 기본적으로 말하면 남자는 일을 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여자는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 것이다. 가정을 꾸려가는 일은 사회의 그
어떤 다른 일보다 소중하고 우선이 되어야 한다. 남자가 밖에 나가 일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가정을 꾸려가기 위한 수단이 아닌가. 인간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려면 이러한 기본적인 관계는 지켜져야 한다. 교묘하게 포장된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워 그것을 함부로 난도질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몸을 보면 손이 할 일이 있고 발이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순리에 의해 움직일 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눈으로 들으려 하고 귀로 보려 하면 들을 수도 없다. 여자가 제 일은
제쳐둔 채 남자 일에 매달리고 남자 도한 그렇게 여자 일에 끼어들어 역할 분담이
허물어졌을 때 가정과 사회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온갖 편법이 난무하고,
그로 인해 평화는 깨질 것이다.
기혼 여성의 사회 참여를 무조건 반대하거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라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가치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선후의 문제로 봐야 한다.
즉 여성의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를 알아야 한다. 여성은 직장보다는
가정에서 우선적으로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 직장 일도 하고 가정에서도 제
역할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항변할 이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기혼 여성이 직업을 가졌을 경우 대개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아닌 편법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여인네의 손맛 대신 밥상 위에는 인스턴트 식품들이 진을 치고,
가정의 훈훈함은 안주인의 부재로 유발된 냉기에 사라진다. 필설로 그 문제점을
다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텅 빈 집에 늘 혼자 있어야 하는 아이를 상상해 보라. 특히 편법 속에서
아이들이 자란다는 것은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아이들은 바로 미래의 주역이요,
희망이다. 그 아이들이 제대로 잘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그 중요한 일의 상당 부분은 가정에 있는 어머니의 몫이다. 밖에서
일을 한다는 핑계를 대로 정작 해야 할 그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십원을 벌러
나갔다가 백만 원짜리 집안의 보석을 잃는 꼴과 다를 게 없다.
사회 분위기가 그런 역할 분담의 왜곡을 부추기기도 한다 가정에서 소중한 일을
하며 제 역할을 다하는 여성들 가운데도 스스로를 비하하는 이들을 가끔 보게
된다. 이웃집의 누구는 돈을 얼마나 벌고, 동창생 누구는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데, 나는 도대체 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조바심을 내는 것이다. 물질
숭배가 팽배한 세상이고 보니 만사를 돈의 척도로 바라보는 나쁜 버릇이 생겨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구분조차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의 소중한 역할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뛰어 나가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해로 말하면 어머니의 역할, 아내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생기는 손해를 어디에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가난한 처지에서 자식을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들의 모정은
눈물겨운 것이다. 그런 어머니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자들이 할 일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을 두고 감히 역할 분담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감히 역할 분담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빼어난
재능을 지닌 여성이 결혼 후에도 그 재능을 살려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 여성이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가정을 꾸려간다면 그 또한
존경의 대상이지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예외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역할 분담의 지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남존여비식의 남성 지배 논리는 가정과 사회의 건강함을 좀먹는 악습이다.
오늘날까지 여전히 남아 있는 그 잔재는 끝내 타파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성과 여성의 역할 분담이라는 조회의 성을 쌓아야 한다. 만약 세상에
남성이 혹은 여성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 보는 것조차 끔찍하지 않은가.
여성을 남성을 위해, 남성은 여성을 위해 조화의 축배를 들자.
유교식 사랑법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평생을 살다 보니 겨우
사랑이란 것을 느끼겠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온 세상을 다 뒤져보았지만 결국
사랑이란 것은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다.
사랑에 대한 이해와 느낌이 그렇게 제각각이듯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도
백가쟁명으로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내게도 사랑은 영원한 주제요 삶의 포기할
수 없는 목적이 된다. 그래서 무엇이 사랑이고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의문을 늘 가슴속에 품고 산다. 그러면서 가끔 떠올리는 구절이 하나 있다.
애무차등
시유친시
사랑에는 차등이 없고, 베푸는 것은 어버이로부터 시작된다는 뜻이다. 언뜻 보면
사랑은 그 대상에 따라 다를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 뿌리를 캐 들어가면 같은
것이다. 부모의 사랑도 사랑이요 이웃 혹은 연인 사이의 사랑도 사랑이다.
이웃을 사랑할 때와 연인을 사랑 할 때 그 마음의 색깔은 다를 수 있다 해도 그
근본적인 생각과 느낌은 결국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한다.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고,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르는 어떤 사람이 연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사랑의 뿌리를 알지 못하고
그저 그 열매만을 이기적으로 따 먹으려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연인에 대한 사랑도 온전한 것이라기보다는 얄팍하고 왜곡된 욕망의 부산물일 수
있다.
흔히들 자식이나 친구 혹은 연인에게 ‘너만을 사랑한다’는 식의 말을 하곤 한다.
그것은 자기의 간절한 마음을 전하려는 표현으로는 감격스럽기까지 한 것이지만,
그 진정한 뜻은 ‘주위에서 많은 사랑을 느끼지만 특히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
되어야 사랑의 본모습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리라. 사랑에는 이렇게 차등이
없어야 그 뿌리를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베품은 어버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역시
흘려버릴 수 없는 진실이다. 자식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애정과 가르침을 쏟는 것, 거기서 사랑은 시작되고, 사람은 그 품안에서
최초로 사랑을 배운다.
요즘 세상을 보노라면 우리는 어쩌면 애유차등에 더 가까이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멸시를 보내고 넘치는 사람에게는 아첨을 하고,
힘 없는 이들을 짓밟으면서 힘 센 이들에게는 추파를 보내는 세태가 아닌가.
그런 곳에 사랑이 자리할 곳은 없다.
해외 입양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돈을 받고 외국에 입양아를 가장 많이
보내는 수치스런 국가가 바로 우리나라라는 사실은 고개를 들기도 부끄러운
일이다. 외국의 언론들은 입양아 수출로 돈을 버는 나라라고 냉소를 퍼붓는다니
참으로 안타깝고 참담한 노릇이다. 해외 입양이 그렇게 많은 것은 근본적으로
말하면 버려진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지만, 현실적으로 국내 입양이 적기 때문이라
한다.
입양에 대한 여러 얘기를 듣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어쩌다 국내에서 입양을
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만 그들은 대부분 예쁘고 똑똑한 아이들만 찾는다고
한다. 그래서 지체장애아와 같이 몸과 마음에 상처가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해외의 양부모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키우겠다는 것은 어쨌든 가상한 일이고, 예쁘고 똑똑한 아이만을 찾는 것 역시
사람들이 응당 보이는 태도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한 것일까.
상처를 지니고 있는 아이들을 데려가는 사람들은 예쁘고 똑똑한 아이들이 당장
품고 있기에 좋은 줄 몰라서 더 어려운 선택을 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리라.
그들은 차등 없는 사랑을 실천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쁘게 생겼건 밉게 생겼건,
똑똑하건 바보스럽건, 몸을 제대로 가누건 가누지 못하건 따지지 않고 그들은
사랑의 손길을 내밀고 싶었을 것이다. 오히려 베풀 것이 더 많을 수 있다는
이유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선택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태도에 차등
없는 진정한 사랑의 실체가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이 바로 어짐이다.
가난하고, 외롭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어질지 못하고 베풀지 못하면 사랑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유가에서는 인을 가장 핵심적인 가치관으로 꼽아 왔다.
우리 민족은 본래 사랑의 은근함을 소중하게 품고 살아왔다. 배추속 같은
사랑이다. 잎을 하나 슬쩍 벗기면 속이 나오고, 다시 잎 하나를 벗기면 속이
나오는, 그러면서 그 속내를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그런 사랑이다.
마음의 정표가 담긴 선물을 받았을 때도 ‘고맙다’는 식의 표현보다는 ‘뭐하러
이런 걸 사왔어’라 한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런 표현이 무슨 뜻인
줄 충분히 느낀다. 그러면서 뜸을 들여 밥을 짓듯, 사랑도 푹 뜸을 들여 익힌다.
쉽게 만나고 또 쉽게 헤어지는 요즘의 경박한 사랑 놀이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은근함이 배어 있다.
형제 혹은 친구와 나누는 애정도 은근함의 운치가 넘친다.
사상무일하야
무기상견이니
낙주금석하야
군자유연이로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몰라, 서로 볼 날이 얼마 없으니, 술로써 오늘밤 즐겨,
우리들의 잔치를 열어 보자는 내용이다. 정을 나누어도 이렇게 나눈다. 짧은
인생 속의 소중한 만남을 말하면서 은근히 애정의 필요성을 서로 나누고, 마음을
열 수 있는 술을 하나의 매개로 삼아 애정의 즐거움을 노래한다. 다른 그 어떤
목적 때문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를 나누고 싶은 마음, 그것이 사랑이다.
인생을 나누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삶, 그것은 아마 가장 행복한 삶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행복과 사랑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요, 남이 갖다 주는
것도 아니다. 사랑을 꿈꾸는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을 갖추려 애를 쓰는 것, 그것이 유교식의 사랑법이라 할 수 있다.
요건을 갖춘다는 것은 요령을 부린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스스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윤리를 배우고 도덕을 배우고 인간적인 도리를
배워 실행할 때 그 사람은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주머니 속의 돈이나 얼굴에 바른 분으로 사랑을 얻으려는 것은 얄팍하고
가증스러운 요령에 불과하다. 남자는 남자로서, 또 여자는 여자로서 쌓아야 할
덕목이 있다. 그 덕목을 쌓는 것이 바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을 갖추는
것이다. 사랑은 쉽게 맡을 수 있는 향수 냄새가 아니라 은은하게 가슴속 저 깊은
곳으로 느껴지는 꽃 향기와 같다.
유교식 사랑법이라는 제목으로 적어가다 보니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동성동본인 남녀의 결혼 문제다. 때때로 이 문제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런 결혼을 반대한다.
남녀의 윤리가 바로 가정의 윤리요, 세상의 질서는 남자와 여자의 질서와
분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질서라는 것은 나라마다 지역마다
나름대로 가꾸어 온 관습에 따라 세워진다. 관습이 오래 되면 전통이 되고, 그
전통은 곧 문화요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결혼의 근친성 여부를 따질 때 어떤
나라에서는 사촌의 범위만 넘어서면 결혼할 수 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그 기준이
십촌쯤 되는 곳이 있을 것이요,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동성동본 금혼의 질서를
지켜온 곳도 있다.
물론 어떤 전통이 그릇된 것이라면 언제든지 바꾸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장점을 살려나가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동성동본을
피하는 우리의 결혼관은 유전학적으로 봐도 훌륭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가꾸어 와 미풍양속이 되었다. 관습과 전통이 무너지면 세계의 상놈이요, 종이
된다. 다른 민족의 경우를 비교할 것이 아니다.
그것을 허물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언필칭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말한다.
그러나 윤리와 질서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과연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것일까. 동성동본 금혼의 질서가 무너진 후에는 또 무슨 소리가 나올 것인가.
아마 십촌이 아니라면, 다시 육촌이 아니라면 하다가 사촌의 벽도 넘자는 주장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과연 자유요 권리인가. 물리 새는 작은 구멍을
막기 위해 더 큰 구멍을 뚫을 수 없듯이 불법을 저지른 이들을 위해 또 다른 법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동성동본 금혼법이 폐지되면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15대손이니 16대손이니 하는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민족을 이어 온 그 세대
관계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현실적으로 안타까운 남녀가 있다는 것을 안다. 이미 결혼을 했는데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로 법적으로 부부가 못 되고, 따라서 그들의 자식들마저
부부의 호적에 당당히 오르지 못해 여러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다. 이들을
위해서는 한시적인 특별법으로 구제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동성동본의 결혼을
전면적으로 허용함으로써 지킬수록 좋은 우리의 전통을 허물어서는 안 된다.
지킬 것은 무시하고 누릴 것만 말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후세 교육은 궁합에서부터
다행스럽게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빛을 말하는 선조의 지혜들이 있으니, 태교가
그 가운데 하나다. 새로운 세대의 젊은 부모들까지 포함해 태교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부모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이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산모를 비롯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다. 세상과의 첫 만남은 뱃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뱃속의
아기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 위해 산모는 말과 행동에 조심하고, 먹는 음식에
유의하고, 아름다운 예술이나 풍경을 접하고, 현명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등의
노력을 한다. 참으로 가상한 모습이다.
교육을 말할 때 청소년기나 성인이 됐을 때의 교육에 앞서서 유아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유야 교육에 앞서서 태교의 영향력이 중시된다. 그러나 후세
교육을 잘하기 위해서는 태교 이전부터 정성을 쏟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부부 사이에서 생긴 자식은 태교를 받기 이전부터
이미 여러 문제를 가질 수 있다.
기가 서로 맞지 않는 부부 사이에서 좋은 후세가 태어나길 기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음식의 궁합을 예로 삼아보자. 어떤 음식들은 함께 먹으면 영양상
좋은 게 있고, 또 어떤 음식들은 결합되면 서로의 영양가를 파괴하면서 몸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있다. 각각의 음식은 저마다 영양분이 아주 높다 해도 잘못
결합되면, 즉 궁합이 맞지 않으면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성을 쌓을 때도 돌끼리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해야 한다. 하나 하나
쌓이는 돌끼리의 궁합이 맞지 않으면 성을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진다. 둥근
장독에 궁합이 맞지 않는 네모난 뚜껑을 덮으면 어떻게 될까. 바람이 불면
덜덜거리며 흔들릴 것이고 맞지 않아서 새긴 틈새로 벌레들이 기어들어갈 것이다.
잘못 결합된 음식이 영양가를 헤치고, 잘못 결합된 돌들이 성을 무너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궁합이 맞지 않는 부부 사이에 태어난 후세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문제를 안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이후도 문제는 더해진다.
궁합이 맞지 않는 부부는 심할 경우는 어느 한쪽이 죽을 수도 있고, 건강이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성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상대방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한다. 서로 밀어내는 자력처럼 사사건건 대립을 하다가 서로를
포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곤 하는 것이다. 그런 부부 아래서 이미 문제를 안고
태어난 자식이 제대로 크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기대라 할 수 있다. 음식의 궁합이나 돌의 궁합은 눈으로 보고
느끼면서 남자와 여자 양성으로 나뉜 인간의 근본적인 궁합을 외면하는 것은
참으로 딱하고 안타까운 노릇이라 아
최근 댓글